이번 호부터는 일제가 한국교회를 어떻게 박해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는 한국에서 편 종교 정책, 특히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줄기차게 탄압과 박멸로 일관하였다. 물론 총독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그 정책의 일관성에는 변함이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공포되면서 서울에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초대 통감으로 왔다. 그는 주한 선교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선교사들의 교육과 의료 사업에 대해 공개적으로 치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보였다.
“일본이 개혁을 단행할 때 고위 정치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불신으로 종교의 관용 정책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나는 종교와 포교의 자유를 위해 과감히 투쟁하였고, 결국 승리하였다. 나의 이론은 이렇다. 문명이라는 것은 도덕에 근거하고 최고의 도덕은 종교에 근거한다. 따라서 종교는 관용되어야 하고 격려되어야 한다.”
이런 것을 근거로 할 때 이등박문은 기독교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지닌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안중근에 의해 1909년에 격살되고, 1910년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후 초대 총독으로 내한한 사내정의(寺內正穀)는 노골적으로 반기독교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앞으로 한국 교회가 겪을 수난을 예고하였다. 그가 일본에 있을 때, ‘한국 내 기독교가 정치에 간섭할 마음만 없다면, 신교의 자유는 존중되고 전도활동도 보장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 말에 불과했고,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보여준 행적을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다.
사내정의는 1913년 12월 동경에서 행한 연설에서 “기독교회는 조선에서 가장 힘 있는 세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곳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특별한 경계를 지속해야만 한다”며 조선교회 무력화에 온 힘을 쏟을 것을 은연중 암시하였다. 그가 한국에 도착하여 시행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정책은 구체적으로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기독교 학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한다고 판단한 그는 이들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국가적 축일에 일본 천황의 사진에 절하도록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우상을 섬기고 절할 수 없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도전함으로 기독교와 대결을 시도했다.
일제는 1909년에 시작된 백만명구령운동을 교회의 조직적 항일운동을 위한 전초전으로 인식했다. 그는 이 운동이 정치적 운동이라 억지를 쓰면서 교회의 신앙적 활동에 제동을 걸고 나왔다. 사내정의는 교회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 집단이며, 이 집단을 와해시키지 아니하고는 효율적인 조선 통치가 난관에 부딪치게 될 것이란 판단을 했다. 이에 그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억누를 일련의 음모를 획책했다.
기독교가 일제의 한국 식민지 통치에 가장 장애가 되는 집단이라 판단한 저들은 기독교 세력이 가장 강한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교계 지도자들을 사전에 억압할 필요를 느꼈다. 이 지역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신앙심이 깊었으며, 교회가 서는 곳마다 학교를 세워 후세 교육에 열성을 다하였다. 따라서 장로교회 계통의 학교만 해도 1907년에 405개, 1908년에 561개, 1909년에 719개로 매년 150여 개의 학교가 증설되었다.
1908년경 황해도에서 김구(金九), 최광옥(崔光玉), 도인권(都寅權) 등의 기독교계 인사들 중심으로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라는 단체가 구성됐다. 이 단체의 목적은 한 면(面)에 한 학교를 세워 교육에 전념하여 국민을 계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런 움직임을 항일을 위한 작업으로 인식하고 이를 박멸할 구실을 찾았다.
그런데 이토(伊藤)를 격살한 안중근의 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이 서간도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세울 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안명근을 내란 미수죄로 기소하면서, 해서교육총회의 회원 모두를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이를 근거로 안명근은 종신징역, 김구 등 7명은 15년, 기타 여러 회원들은 10년에서 5년까지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40여 명은 울릉도와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니 이것이 곧 ‘해서교육총회사건’ 혹은 ‘안악사건’(安岳事件)이다. 이로써 황해도 지방의 기독교 유력 인사들은 척결되었다. 이제 일제는 그 방향을 평안도 지방으로 돌려 그곳 기독교 지도자 박멸의 음모를 진행하였는데, 이것이 ‘105인 사건’이다.
‘105인 사건’이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고 나서 기독교 세력이 항일 정신에 충일해 있다고 판단하고, 서북지방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하려던 음모다. 초대 총독 사내정의는 전직 육군성 장관이며 철저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으로 한국 통치를 위해 경찰과 헌병으로 철저한 강권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그는 조선통치를 위해 일본 무관 출신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에게 경찰과 헌병의 통수권을 주고 한국을 큰 병영으로 만들어 군대식 통치를 수행하게 하였다.
105인 사건은 총독부 경무총감 겸 조선헌병사령관 명석원이랑이 획책한 사건이다. 당시 조선에서 서북 지방의 기독교 세력이 가장 강했다. 또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곳에 대거 몰려 있는 것을 간파한 그는 이 지방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모조리 투옥하여 처음부터 기독교 세력을 짓눌러 버릴 계획을 꾸몄다. 당시 평양 지방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비롯, 여러 교파들이 막강한 세력을 과시했고, 지도력 또한 강력하여 과히 한국교회의 중심지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므로 항일적 요소가 짙게 배어 있었으므로 일제로서는 가장 신경 쓰이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