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남강은 학생들에게는 잔소리꾼이었다. 오산학교에는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단심강(丹心崗)'이라는 단(壇)이 있었다.
매일 학교 조회가 열리면 남강은 학생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른 뒤 훈화를 했다. 이때 남강은 학생들의 학업뿐 아니라 태도 하나하나를 꼬집으며 잔소리를 했다.
"바른 자세로 걸어야 하며, 땅을 내려다보며 헛생각을 하면 안 된다. 양반처럼 느릿느릿 걸어서는 안 되며, 한 걸음 한 걸음 일정한 속도로 걸어야 하고, 도중에 쓸데없이 노닥거리지 말며, 먼 산을 쳐다보거나 손을 내두르거나 폼을 잡은 채 콧노래를 해서는 안 된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 요새 젊은이들이 실천하긴 힘들 수도 있겠으나, 몸에 배이고 나면 여러분의 큰 재산이 될 것이다."
오산학교는 남강과 일심동체였다. 교사들은 그의 형제였으며 학생들은 자식과 같았다. 그 학교에서 모든 교육의 초점은 바로 민족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에 난데없는 불상사가 닥쳐왔다.
평안북도 관찰사가 교체되자 유학자들이 태도를 바꿔 향교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경비가 많이 든다느니, 공자와 맹자의 경전만 가르쳐야 한다느니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대인이니 군자를 내세우면서 하는 짓은 소인배를 찜쪄 먹겠네."
남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돌아가는 현실을 모르는 양반 유학자들이 야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결국 향교 재산을 반납하고 처음부터 재출발하기로 결심했다.
남강은 자신의 남은 재산을 모두 팔아 학교에 쏟아부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청빈한 몸이 되었다.
"오산은 일개 건물이 아니라 민족혼을 양성하는 곳이라. 남은 세간을 팔아 학교에 보태고 우리는 학교 옆에서 학생들 밥이나 해 주면 되지 않겠는가."
가장의 결심이 워낙 강하여 부인과 자녀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허심탄회했다. 하지만 남강의 힘만으로 학교 운영비를 충당하기는 벅찼다. 그래서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자금을 모았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10년 늦여름, 오산학교의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동창에 공부하던 우리 학우들
무정세월 여류하여 오늘 당했네
검은 연기 불꽃 속에 같이 울던 우리
모진 광풍 물결 위에 휘날리던 우리
봄바람에 꽃이 피자 서로 이별하니
우리 부탁 다만 이것 오직 산 영혼
평화원에 잡은 손목 피차 나뉘니
석별하는 회포는 가이 없어라.
재학생들이 졸업가를 부른 후 교장이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졸업증을 수여했다. 오산학교 설립을 후원하고 물심양면으로 운영을 도운 많은 내빈이 참석했다.
남강은 다음과 같은 훈시를 했다.
"학교가 초창기가 되어 여러 가지 설비가 부족하여 여러분이 공부도 변변히 못하고 교문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형편은 편히 앉아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세상으로 나아가 여러분들이 배운 만큼이라도 우리 동포들을 깨워줘야 합니다.
여러분을 거칠고 험악한 이 세상에 보내는 것이 마치 이리떼에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거칠고 험악한 것을 정복하고 새 길을 여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임무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부탁할 것은, 오산의 졸업생들은 어디를 가든지 거짓말로 남을 속이지 말고 자기가 맡은 일을 게을리하지 말고 몸소 실행하며 민족의 영광을 높이는 훌륭한 인물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배운 것만이라도 실행하십시오. 천만 가지 재주를 배웠더라도 실행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라, 민족을 구하라! 이 말만 하겠습니다."
가슴이 벅찼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오산학교에는 인격과 애국심을 지닌 인물이 많았다. 이런 교사들에게 배운 학생들 중에 훗날 애국지사가 많이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 무렵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춘원 이광수도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조선의 천재라고 자부하며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청년이 용동에 오자, 남강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따뜻이 맞아 주었다.
이광수는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을 뿐 아니라 자기 같은 인재가 오산에 온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남강은 이광수와 함께 교정을 거닐다가 문득 말했다.
"춘원 선생과 같은 분이 한 알의 씨앗처럼 자기를 버리고 민족의 땅 속에 들어가 썩는다면 파릇파릇한 새싹이 날 텐데요."
그 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광수는 정성을 다해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직접 쓴 글을 등사해서 교재를 만들고 자신이 앞장서 학교를 청소했다.
내가 민족운동의 첫 실천으로 나선 것이 교사생활이었다. 나는 오산학교에 와서 사람 노릇하기를 조금 배웠노라.
▲김영권 작가(점묘화). |
춘원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