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말하는 다문화주의의 역사는 20세기 초 동화정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최초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캐나다에서였다. 1965년 캐나다의 ‘이중언어와 이중문화 위원회’가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971년부터는 캐나다 내에서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정책을 이르는 용어가 다문화주의였다. 그리고 이어서 미국에서도 다문화주의라는 용어를 1990년 이후부터 언론이나 정부에서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은 1609년 영국인들이 버지니아 해변에 도착해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과 만났을 때부터 수백 년 동안 다인종, 다문화 사회였다. 그러함에도 미국은 20세기 초반까지 ‘백인의 나라’라는 정체성을 고수해 왔다. 다시 말해 그 당시에는 아프리카계나 원주민, 아시아계 등 유색인종은 미국 사회 내에 살면서도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계의 경우 1867년에, 원주민의 경우 1924년에 시민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남부 사회에서 아프리카계는 여러 물리적, 사회적, 법적 제재로 거의 참정권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며 유색인들 또한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으며 오랜 시간동안 미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이에 항거하여 인권운동을 펼친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이다. 그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결국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머어하우스 칼리지와 크로저 신학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마치고 보스턴대학교(BU)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침례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의 인권운동은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며 그는 일부 과격파 흑인들을 어르고 달래서 비폭력 운동을 펼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 결과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지만 1968년 4월 4일에 과격파 백인단체의 인물인 제임스 얼 레이에게 암살당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인권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목적과 언약에 근거한 ‘다문화 회복운동’이었다고 이해하여 볼 수 있다. 세계화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은 결코 민족적 혈통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4일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한 날이다. 오늘 우리는 그가 외쳤던 “나에게는 꿈이 있다” 연설을 기억해 본다. 아마 그가 죽기까지 외쳤던 그의 꿈은 여전히 유효한지 모른다. 우리도 하나님의 꿈을 생각하며 주님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명령 앞에 순종의 삶을 살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