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사형은 신약 성경과 성경 외의 여러 역사적인 문헌들을 통해 확인된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 사형을 로마인들에 의해 시작된 사형 제도로 이해하지만, 십자가 사형은 사실 주전 1천년 전, 앗수르, 페니키아, 페르시아에 의해 사용된 징벌과 사형 제도였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유입된 십자가 사형은 그리스 본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시실리와 이태리 남부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헬라 시대에 십자가 사형이 자주 집행되었는데, 주전 323년 알렉산더의 사망 이후 십자가 사형은 셀류키드 왕조와 톨레미 왕조의 국가적 사형 제도로 채택되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였다. 신명기 21:22-23에 의하면,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형 제도는 돌을 던져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스모니안 시대에 유대인들이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던 많은 경우가 있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주전 103- 76년)는 주전 88년, 하루에 800명의 바리새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도 했다.
주전 1세기 말,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제국의 공식 사형 제도로 채택하였다. 십자가 사형은 로마인이 아닌 노예에 제한되었다. 십자가에 해당 하다고 판결된 노예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처형장까지 지고 갔다. 이것은 죄의 책임을 묻고 많은 이들로부터 모욕을 주기 위함이었다. 십자가 제도 초기에는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노예를 꼭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징벌적 의미가 컸지만, 주전 1세기에 점차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형 제도로 자리잡았다.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는 노예에게 징벌 제도로 사용된 십자가 제도는 후에는 전쟁 포로자들, 반역자, 도망자들을 처형하는데 사용되었다. 특히 전쟁 중에 반란 자들이나 도망자들이 대거 처형되기도 했다. 주전 71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때에 로마인들은 카푸스(Capus)에서 로마(Rome)에 이르는 도로 변에 6천명을 십자가에 처형하여 즐비하게 세워두기도 했다. 헤롯 1세가 죽고 주후 7년, 유대 땅에는 작은 민란이 발생하였다. 당시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구레뇨는 예루살렘에서 2천명의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도 했다.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는 하루에 500명까지 수 개 월동안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도 했다.
십자가 사형틀에 못을 박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 사형수는 나무 틀 위에 눕혀졌다. 그리고 그의 어깨는 십자가 위쪽에 고정시켰고, 그의 양쪽 발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몸무게를 지탱해 줄 받침대는 없었다. 그러면 나무 틀에 달린 사형수는 두 세 시간 내에 심한 근육 경련과 질식으로 사망에 이르렀다. 십자가에 달리면 사형수는 우선 숨을 쉬기 어렵다. 그래서 사형수는 자신의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지탱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 사형수는 약 30-60 초간 지탱할 수 있지만, 이후에는 기운이 빠지고, 질식과 근육 경련의 반복으로 결국은 탈진, 혼미한 정신, 온 몸의 고통과 함께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고통은 몇 시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팔레스틴에서 유대인들을 처형할 때에 한 가지 배려를 하였다. 다리를 꺾으므로 사형수가 십자가에서 빨리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로마인들은 사형수들이 십자가에 달린 채 고통을 느끼며 죽음에 이르도록 했지만, 그러나 죽은 자를 당일에 장사 지내야 하는 유대인의 문화를 고려하여 속히 죽음에 이르도록 다리를 꺾었던 것이다. 그러면 밤이 되기 전에 장사 지낼 수 있었다(요 19:31-33).
1968 년 무더운 여름이다. 예루살렘 옛 성(Old City of Jerusalem)에서 북쪽 멀지 않은 유대인 마을인 기브앗 하미브타르(Giv’at HaMivtar)에서 1세기 당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발굴된 무덤은 주후 1세기의 전형적인 유대인 가족 무덤(Kokhim tomb)으로, 무덤에서 몇 개의 석관(Ossuary)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석관에서는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은 사람의 뼈가 못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는 십자가 사형에 대한 고고학적인 유일한 증거이다.
예수님은 유대 종교인들의 시기와 모함에 의해 로마 총독인 본디로 빌라도의 판결에 따라 십자가에 못이 박혀 돌아가셨다. 이에 대한 기록은 신약 성경과 당시 역사적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 사형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는 기브앗 하미브타르에서 발견된 유물이 유일하다. 석관(Ossuary)에는 죽은 자의 이름이 ‘요하난 벤 하그콜(Yohanan Ben Hagkol)’로 기록되었다. 요하난은 24-28세의 젊은 남자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십자가 처형의 죄목은 알 수 없지만 요하난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한 것은 분명하다. 석관에서 나온 요하난의 오른발 뒤굼치 뼈에 큰 쇠못이 박힌 것이 그 유력한 증거이다.
요하난 벤 하그콜은 1세기 팔레스틴에서 살았던 평범한 유대인이었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무덤과 석관에서 발견된 증거로 보아, 요하난은 십자가에 달린 채 숨이 끊어졌으며 그의 가족에 의해 유대인의 장례 절차에 따라 가족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요하난의 시신을 장사 지내는데 문제가 있었다. 요하난의 뼈에 단단히 박힌 쇠못을 빼내는 것이 문제였다. 올리브 나무로 만든 십자가 사형 틀과 사형수의 뼈에 깊이 박힌, 구부려 놓은 쇠못을 빼려다 잘못하면 요하난의 뼈를 으스러지게 할 수 있어 가족은 하는 수 없이 십자가 사형틀의 나무 일부와 쇠못이 뼈에 박힌 채 그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유대인의 장례 절차에 따라 시신을 무덤에 안장한 지 1 년이 되는 날, 가족은 그의 무덤을 찾아 요하난의 오른발 뒤꿈치에 쇠못이 박힌 채, 뼈를 석관에 담았다. 그리고 요하난의 석관은 2 천 년이 지난 1968 년 여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필자는 요하난 벤 하그콜의 무덤을 찾기 위해 꼬박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무덤을 찾아나선 날, 필자는 고고학 백과사전, 이미 읽고 정리한 요하난의 무덤에 대한 글, 그의 무덤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준비하고 4X4 지프를 타고 기브앗 하미브타르 동네로 향하였다.
이미 발굴된 지 30여 년이 지난 옛날 무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그 동네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요하난 벤하그콜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그런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네의 오래된 작은 가게를 찾아가 주인을 통해 그 동네의 토박이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그를 통해 고대 무덤이 발견된 허름한 집을 찾았고 그 허름한 집 주인을 통해서 요하난 벤하그콜의 무덤 위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하난 벤하그콜의 무덤은 집 재건축 과정에서 사라지고 없었으며, 그의 석관은 현재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쇠못이 박힌 요하난 벤 하그콜의 뼈는 똑같이 복제된 후, 간단한 장례 절차를 거쳐 영구히 매장되었다. 쇠 못이 박힌 뼈를 보존, 전시할 수 없는 것은 유대 종교인들은 고고학자들이 유대 조상들의 무덤과 그들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쌔 . . .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에 샀더라 (요 19:17-18,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