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그대로 '사자의 부르짖음'을 말한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한 번 부르짖으면 사방 수십 리에 이르는 모든 짐승들은 무서워 피하듯, 웅변이나 정견 발표시 큰 소리를 내어 열변을 토하는 것을 가리켜 '사자후(獅子吼)'라고 말한다.
사자후는 불가에서는 보통 석가모니의 설법으로 통한다. 부처의 설법은 그 위엄이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감화가 있고 놀란 악귀들을 쫓아낸다 해서 이 말이 붙었다. 일설에 의하면 부처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짝을 걸어가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하면서 사자후를 토했다고 한다.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곧 사자후의 위엄이 넘치고 심경을 찌르는 깨달음의 소리 지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자후는 남편을 궁지에 몰아세우는 성미 사나운 아내의 불호령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웅변가나 정치가들이 열변을 토할 때 '사자후를 토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낯선 말이 뜻밖에 교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예배 시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신자라면 장로님이나 안수집사님이 '대표기도'를 할 때 심심치 않게 이 말을 쓰고 있음을 발견하곤 의아해 한다.
"하나님 아버지, 설교하시는 목사님께서 사자후를 토해내실 때 우리 심령 골수를 쪼개어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저희가 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사자후'라는 단어에 일순 은혜로운 기도의 맥이 끊어지는 듯한 뜨악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잠시 동안 아프리카 정글의 왕인 사나운 사자가 꾹 감은 눈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 밖에서나 쓰일 법한 '사자후'란 용어가 신성한 교회에서도 쓰이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 비범한 말이 어떤 연유로 교회에서도 쓰이게 된 걸까?
필자가 보기엔 아마도 아모스서에 언급된 성경구절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잘 아시다시피 아모스는 이스라엘 각 개인과 집단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 선지자다. '정의의 선지자' 아모스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을 대리하여 부르짖는 선지자의 강렬한 설교를 사자(獅子)가 토해내는 우렁차고 위엄이 넘치는 소리와 유비했다.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고 이스라엘을 향해 일갈한 그는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며 연이어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당시 아모스의 설교를 들었던 청중은 고막을 터지게 하고도 남을 선지자의 쩌렁한 음성에 놀라 사시나무 떨듯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아모스의 예언의 메시지가 사자가 큰 소리로 '어~흥' 하는 것 같이 두렵고 위엄이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가 쓴 책의 처음부터 등장한다. 곧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토해내는 아모스는 이렇게 처음부터 사자후 모티브로 자신의 설교를 시작해, 마지막까지 이러한 기풍을 견지해 나가고 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사자의 목소리와 같다는 이미지는 시내산 언약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를 빠져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천신만고 끝에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우레와 번개와 큰 나팔 소리를 동반하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다는 출애굽기의 묘사에서 그 기원을 더듬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에 온 산이 크게 진동하고 나팔 소리는 점점 더 커져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산에 오르지 못하고 두려워 떨어야 했다(출 19:16-23).
그런데 우습게도, 교인들 가운데 사자후(獅子吼)를 사자후(使者吼)가 아닐까 지레 짐작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한 분들은 한자사전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使者吼'란 단어가 나오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한다.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간혹 이런 식으로 혼동하는 까닭은 설교를 하는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使者, messenger)'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표기도로 나선 교회 중진이 "하나님, 오늘 설교하시는 사자 목사님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충만하게 하옵소서"라고 할 때의 '사자'는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목덜미에 긴 갈기가 있고 사납게 생긴 맹수인 사자(獅子)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인 '사자(使者)'를 가리킨다.
사자후라는 뜻이 이러한데도, 공기도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인 당회장 목사님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라고 말할 때, 그 기도를 듣는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사나운 사자가 연상되어, 순간적으로 목사님이 맹수처럼 마음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다. 무서운 사자가 목사님으로 돌변(트랜스포메이션)한 것 같은 착각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자후란 말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기도시간에는 가능한 한 남발하지 않는 게 좋겠다.
▲김준수 목사. |
김준수
중앙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정부기관과 대기업 등에서 일하다 50대 초반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 입학했고, 풀러 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 과정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다. 저서로는 베스트셀러 <내 삶을 다시 바꾼 1%의 지혜>와 지난 10년간 집필해 온 신·구약 성경신학 7권 중 첫 권인 <모세오경: 구약신학의 저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