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처 없는 귀국 길: 월세보증금 은행 대출을 거절당함
방문교수의 임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당장 거처할 집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20년 동안 외국에서 생활했으니 재입국 과정(re-entry process)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따라, 선교지를 떠날 때 훈련받았던 한국해외선교훈련원(GMTC)에서 3개월 동안 한국 적응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원 숙소에서 몇 달을 보내면서 집을 알아보는데, 월세는 월급을 받아서 낸다고 해도 월세 보증금을 마련하는 일은 무일푼이었던 제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습니다.
30년 동안 거래했던 은행 통장에는 늘 "우수고객으로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라고 인쇄되어 있었건만, 대출을 받을까 하여 찾아간 은행에서는 보증금 대출이 어렵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신용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등급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희 은행 30년 고객이시지만, 대출 거래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고, 마이너스 통장도 만들지 않으셨네요."
"이제라도 만들면 안 되나요?"
"지금은 근거가 없어서 마이너스 통장도 안 됩니다."
몽골 제자가 빌려준 돈으로 집을 얻다
선교사가 선교비를 받아 생활했기에 한국에는 세금 납부 실적도 없고, 은행 거래 실적이 별로 없었겠지요. 은행에서 퇴짜를 맞고 걱정이 앞서는데, 이미 한국에 나와 작은 사업을 하고 있던 몽골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반갑게 만나 그간 지내온 이야기들을 하는데, 자연스레 한국 정착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선생님, 집을 어디에 얻으셨어요? 한국은 집 얻는 게 만만치 않아요. 혹시 집 얻으실 돈이 필요하면 빌려 드릴게요."
"그래 1,000만 원만 빌려줄래?"
제자에게서 월세 보증금 일부를 빌렸습니다.
선교사는 현지인의 도움과 협조 없이는 일할 수 없어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선교를 마치면서 이제는 현지인에게서 사랑의 도움을 받는 게로구나!'
선교사는 현지인들에게 베풀고 도움을 주는 존재로만 생각했습니다만, 이제 돌아보니 현지인들로부터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몽골 정부가 호의적으로 받아주었기에 외국인이 대학을 설립할 수 있었고, 몽골 최고의 교육 전문가들이 우리 대학에 합류하여 일했고, 학부모들은 한국에서 세운 대학이니 정직하게 운영하리라 믿어 주어 자녀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보냈습니다. 학교에서 결정한 사항들에 대해 몽골 학생들은 자신들을 사랑하는 선교사요 스승이라 믿고, 엄격한 학사 운영을 잘 따라 주었습니다.
선교는 주는 것보다 오히려 현지인으로부터 받는 도움이 더 많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현지 사역을 끝내고 귀국하여 고국에 정착하는 데까지 선교 현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었네요.
▲지난 2011년 12월 열린 귀국 환영회 및 송년 모임에서, 월세 보증금을 빌려 준 몽골 제자 자야트(오른쪽)와 함께. |
의리를 배우고, 의리를 지키는 현지인들
월세 계약을 마치고 이사를 하는데도 몽골 제자들이 이삿짐을 옮겨주겠다고 하여 괜찮다고 했지만, 한국의 웬만한 이삿짐센터는 몽골 사람들이 꽉 잡고 있다면서 우르르 몰려와 반나절 만에 뚝딱 해치웠습니다.
함께 방바닥에 앉아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있는데, 한 제자가 제게 귀띔해 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 다음 달에 두 분이 깜짝 놀랄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선생님은 가족들과 함께 몸만 오시면 됩니다."
2011년 연말쯤, 한국에 약 200여 명 넘는 제자들이 한국 곳곳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대개는 한국 대학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배우는 유학생이 많았고, 한국에 주재하는 몽골 기업이나 은행, 정부 파견 직원 중에 상당수가 울란바타르대학교 출신 제자들이었습니다.
일부 젊은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몽골 정부 계약에 따라 산업연수생이나 한국 기업에 취업하여 일하고 있었고, 몽골항공이나 대한항공 승무원이 된 제자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낯선 한국 땅에서 울란바타르대학교 동문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 주거나, 잠을 재워주고, 한국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는 등 끈끈한 공동체의 유대 정신을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곤 제게 "선생님, 우린 의리의 UB(울란바타르의 약자) 패밀리가 아닌가요? 우리 학교 교훈이 '믿음 소망 사랑' 이잖아요!"
한국말로 또렷이 "의리"라는 단어를 쓰면서, "한국 애들이 우리보다 더 '의리'가 없는 것 같아요. 이기적인 것 같아요."라고 말할 때는 흠칫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래~~~?"
160명이 모인 환영회 겸 송년 모임
드디어 제자들이 준비한 날이 되었습니다. 제게 보낸 초대장에 잠원동 한강시민공원 주차장으로 오라고 하여 갔더니, 한강 위에 고급스런 연회장을 빌려 엄청난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격조 있게 준비한 테이블 장식이 너무 멋있기에 "이걸 어떻게 준비했느냐?"고 물었더니, 호텔경영학과 대학원에 유학 중인 3명에게 부탁했고 그들이 실습한 대로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는 UB 출신들에게 연락이 닿는 대로 알렸고, 참가회비로 5만 원씩 책정하였는데 그날 저녁 16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결혼한 제자들은 아이들도 데려오고, 저희 부부와 사진을 찍겠다고 특별히 마련된 레드 카펫과 포토존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 덕분에 한국에 유학 올 수 있었다고, 취업하여 결혼할 수 있었다고 인사를 받기에 바빴습니다. 아름답게 장식된 환영회 단상에서 인사말을 하는 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5시간 동안 계속된 행사 내내 울란바타르대학교를 설립하고 건물을 세 번을 옮겨 다닌 일과 10여 개가 넘는 건물을 건축하며 캠퍼스를 조성했던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학교 운영 자금이 모자라 전전긍긍했던 일들, 대정부 관계로 어려움을 겪은 일, 다 두고 떠날 때 황당한 오해를 받았던 것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제 마음속에 분명하게 확인한 것이 있었습니다. 선교는 결코 눈에 보이는 업적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결국에 남는 것은 화려한 캠퍼스나 건축물이 아니라 함께 삶을 나눴던 사랑과 신뢰 관계라는 것이었습니다.
▲재한 울란바타르대학교 동문회 체육대회에서. |
서울올림픽과 평창올림픽: 한국교회 해외선교 30년을 돌아보며 본질에 충실한 선교를!
오늘날 한인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는 현장마다 건축이 한창입니다. 선교사역에는 예배당도 지어야 하고, 선교센터도 건축해야 하며, 학교도 세워야 합니다. 저희도 몽골에서 물가가 더 오르기 전에 할 수 있으면 많은 예배당과 선교센터, 수련장을 짓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예배당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예배당에서 목회할, 준비된 현지 지도자, 목회자입니다. 예배당은 세워져 있지만 좋은 현지 목사님을 준비하지 못해 10년이 지나도록 자립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교회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예배당 건축은 재정이 채워지면 대개 1년 만에 완공이 됩니다. 그러나 현지 지도자 한 사람을 세우는 데는 10년 가량 걸리고,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선교 활동의 하드웨어(Hardware)는 순간 갖다 쓸 수 있지만, 선교 활동의 보이지 않는 운영시스템이나 Software를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마음 급한 한인 선교사들과 한국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일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한국교회가 세계 선교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이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입니다. 30년 만에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렸는데, 사람의 나이로 치면 한 세대 열심히 선교해 온 것입니다.
한국 해외선교 정보센터(Krim) 자료에 의하면, 2017년 말 세계 159개국에 21,220명이 파송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진정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열매, 건축물보다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선교지를 떠나 돌아온 한국에서 몽골 제자들이 제게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윤순재
전 몽골선교사(1992~2012)
현 주안대학원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