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과 겨울, 방학 시즌이 되면 많은 교회와 단체에서 국내외 단기선교 혹은 아웃리치를 다녀온다. 또한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지속적인 프로그램과 행사를 통해 선교자원을 동원하고 있다. 이제는 선교의 개념도 변화되어, 타 문화권으로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전문 영역으로 들어가는 선교사를 세우자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런저런 이유와 사정으로 한국교회의 선교 집중력이 많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많은 성도가 지역과 영역으로 들어가는 선교사가 되겠노라 헌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고무적이고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열정만 활활 타오를 뿐, 실제적인 경험과 역량은 함량 미달인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영역 선교사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대책 없는 헌신은 더 심각하다. 그저 말씀과 기도에 힘쓸 뿐 ‘영역 선교’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영역 선교사가 될 수 있는지, 해당 영역에 선교사로 들어가기 위해 배우고 익히고 경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마치 목회자나 기독교 사역자가 되는 것이 주된 목표인 듯하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만은 아니다. 영역 선교 헌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뭔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자연스레 안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을 이해하고 실제적으로 도와줄 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목회자들이나 부모, 주변의 어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다하고 싶다면, 차라리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가 되라고 권한다(시대와 세대가 바뀌어도 그런 인식은 늘 변함이 없는 듯하다). 모두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뿐 영역 선교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헌신한 당사자 혼자 뛰어야 한다. 이러한 고독한 헌신의 과정을 살아내려면, 자기 안에서부터 끊임없이 열심과 열정을 짜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열심과 열정이 바로 영역 선교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헌신자가 열심을 내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 당연한데, 뭐가 문제야?”라며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열심과 열정이 문제라는 얘기는 어딘가 이상하게 들린다. 선교를 한다고 하면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타오르는 가슴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뜨거운 열정 없이 어떻게 거스르고 어그러진 시대와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통치를 선포하고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문제는 열정 그 자체가 아니다. 열정만 갖고서 전문분야와 삶의 현장에 뛰어드는 ‘대책 없음’이 문제다. 열정은 중요하다. 비전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정은 전문 역량이 아니다. 영역 선교를 하려면 전문적인 역량이 필요하다. 역량이 없으면 영역 선교 현장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거나 금세 비전을 잃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더 나아가 주어진 현실에 불만을 터뜨리며, 자신을 그 자리로 부르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나는 지금 역량이 열정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열정 없이 역량만 갖고 있는 사람에게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뜨거운 열정을 연료삼아 구체적인 열매를 맺으려면, 그 과정을 감당할 만한 전문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즉, 열정과 역량의 균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마치 명문대에 몇 명을 합격시키느냐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에는 무관심한 입시학원처럼, 헌신자의 수를 늘리는 데에만 몰두해 왔다. 크게는 세계 복음화와 영역 선교를 감당할 사람들에서부터 작게는 지역교회의 여러 사역을 감당하는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하고 있느냐? 얼마나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준비된 사람이 있는가? 준비된 사람은 누구인가? 그 일을 맡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를 물어야 할 때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뛰어난 학력과 오랜 임상 경험을 갖춘 인재 가 필요하다는 엘리트주의적 발상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열정을 품고 그 열정을 좇아 살기로 결정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마땅히져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전문 역량을 기르는 것이 영성이나 열정, 은사가 아니라 책임감의 문제라고 믿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에게 이 단어가 불편하다면 이렇게 바꿔도 좋다. ‘거룩한’ 책임감! 이는 열매에 대한, 결과에 대한, 더 잘하고 싶은, (수동적 태도의 기독교적 표현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대신 자신이 감당할 몫을 찾아 적극적으로 몸부림치게 하는 책임감이다.
‘가르치는 일’도 마찬가지다. 자신과 함께하는 학생들이 학업과 신앙과 인생에서 더 나아지고 성장하게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와 분별력이 진보해야 한다는 책임감,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가르치겠다는 책임감이 없는 교사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혹은 교회에서 지워 준 영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delivery) 것밖에는 하지 못한다. 이런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에게서 어떤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