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65장 20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을 것이리라."
[답변]
질문은 간략하게 하셨지만 그 의미는 "비록 백세 이상 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사람이 죽는다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뜻인 줄로 이해하고 또 그런 관점에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사도는 계시록에서 분명히 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모든 눈물은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1,4)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벽해야 하는데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지 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과연 사람의 육신적 죽음이 있는가 없는가 어느 쪽이 맞는지 의심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원론적인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구태여 원론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말씀들은 묵시록적인 예언에 해당되기 때문에 문자적인 해석에 집착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1. 성경 예언의 성격
성경 책들 사이에 이런 상충되는 말씀이 나오면 하나님이 나중에 뜻을 변경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사야 선지자나 요한 사도가 잘못한 것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 저자에게 그런 착오나 변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대하고 해석하는 신자가 절대 잊어선 안 되는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이사야서와 계시록 중에 이사야서가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그 말은 이사야서가 한 권의 책으로 편집 완료된 당시에 이미 그 자체로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예언을 해석할 때에 반드시 염두에 넣으셔야 할 것들 중에 특별히 이런 경우에 적용되는 두 가지 원리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1.1. 점진적 계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장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처음에는 그 내용이 불분명하다가 차츰 그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창3:15의 원시적 복음(Proto-Evangelism)에서 시작하여, 차츰 이방인도 구원하고, 행위가 아닌 믿음의 구원이 있을 것이며, 나아가 베들레헴에서 임마누엘 아기가 동정녀에서 탄생할 것이며, 심지어 은 삼십에 배반당할 것이라고 까지 아주 구체적인 사항으로까지 예언을 진행시킵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 상황과 인간의 종교적 수준에 맞추어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고 믿기 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눈 높이에 맞추어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예언의 실현이 가까워 올수록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깨어 경성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예언의 특징은 미래를 점치듯 구체적인 시간 장소를 적시(Foretelling) 하지 않고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만 밖으로 드러냅니다(Forthtelling). 따라서 그 표현 양식은 객관적, 구체적이지 않고 항상 시적이고 상징적입니다.
점진적 계시라는 측면에서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사야서의 계시는 계시록에 가서 더 구체화 된 것입니다. 나아가 이사야서 본문을 문자적으로 사람이 죽느냐 마느냐, 수명이 몇 년이 될 것인가에 국한 해 볼 것이 아닙니다. 너무 일찍 죽는 경우가 많고 백세면 아주 장수한 것으로 보는 당시의 일반적 인식(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에 비추어 그런 죽음들이 절대 보편적 현상으로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것을 감안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수명과 생명과는 전혀 다른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1.2. 이중적 계시
성경 예언의 또 다른 특징은 선지자가 그 예언을 할 때는 오직 당시의 임박한 상황에 적용되어질 수 있는 것을 말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먼 장래의 일까지 이중, 삼중으로 계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시 22편에 다윗이 대적에 둘러싸여 정말 하나님마저 자기를 외면하는 듯한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심경을 있는 그대로 적은 시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를 지었을 당시의 다윗은 자기 시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영감이 그에게 작용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도 저작 당시로선 바벨론으로부터 귀환이 선지자의 일차적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성령의 영감으로 인해 궁극적 구원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이 완전한 것이 아니므로 미래의 완전한 구원을 바라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문자적 표현에 집착해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인간 육신의 생물학적 생사와 수명에까지 연결시켜 해석할 필요가 없고 또 그렇게 해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시 22:16에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는 표현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둘러 쌌고 로마 병정이 예수님의 허리를 창으로 찔렀는데 문자적으로 개가 둘러 싸고 허리가 아닌 수족을 찔렀다고 표현되어 있다고 다윗의 예언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인간의 수명과 생사
2.1. 하나님의 숨겨진 뜻
성경의 예언과 계시가 점진적으로 또 이중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시작부터 끝을 다 보시고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그 말씀대로 서서히 전개되어 가는 과정 안에 모든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계시가 실현되어지고 난 후라야 그 뜻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실현되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시고 완전한 뜻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확실히 알지만 그 방법과 때는 실현되기 전에 언제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는 계시된 뜻과 숨겨진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학자 프란시스 드 살레는 그것을 '선포된 뜻'과 '하나님의 순전한 기쁨의 뜻'으로 구분지었습니다. 전자는 구체적인 때와 방법마저 완전히 인간이 알 수 있게 드러난 뜻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는데 기준이 되는 인간을 향해 갖고 계시는 근본적인 뜻을 말합니다.
이를 성경에 계시된 예언에 적용시키면 계시된 것 중에도 명시(明示) 된 것이 있고 또 묵시(默示) 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명시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성경의 표현과 앞 뒤 문맥으로 따져 구체적인 내용을 사전에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그 귀환 혹은 예수님에 관한 예언과 같이 이미 역사 속에 실현되어졌기에 묵시가 명시로 변한 것이지 아직 실현 안 된 것은 여전히 묵시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에는 계시 되어 있지만 아직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분이 일하는 방식과 때를 심지어 그 일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 중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하나님의 계시대로 이뤄지고 또 그렇게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확실히 믿지만 그 구체적 내용을 자꾸 논의 삼아선 안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의 생사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는 전지전능 하심으로 당신의 영원하시고도 선하신 뜻에 따라 언젠가는 이 물질 세계 전부를 완전히 변형 시킬 것입니다. 당신께서 이 땅의 시간과 물질 세계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 간섭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대로 더 이상 죽음과 슬픔이 없는 세계가 될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2.2.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인간은 죽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눅20:34-36) 예수님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선 죽음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장가도 안가고 시집도 안가니까 아이의 출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 놓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수명과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생물학적 육신을 입고 있을 때에만 적용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에 참여할 부활한 성도는 이미 시공간과 물질계를 초과한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천사와 동등'이라고 했습니다. 수명과 죽음이 문제되는 영역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의 양태를 가지게 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3)
이사야서와 계시록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는 어디까지나 새롭고도 신령한 질서를 인간의 용어로 표현되어진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 뜻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누리고 살 영역은 완전한 상태(Absolute Perfection)가 되며 또 그러기 위해선 그렇게 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세력들, 슬픔과 고통과 죄와 죽음이 더 이상 존재조차 할 수 없는 곳(free from the presence of sin)이라는 것입니다.
백년도 안 되는 수명과 불완전하고 연약한 육신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언제 어떻게 실현될지는 실현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와 계시록의 표현이 서로 상충된다고 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실현 안되거나 연기되거나 성경에 이야기 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리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은 모르지만 그 사랑하는 백성들을 영원히 영화롭게 할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통해 탐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근본 원리이지 때와 방법은 하나님에게 맡기셔야 합니다.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이 성경에 있는 까닭은 이상해 보이기 때문에라도 독자더러 시기와 모습에는 관심 두지 말고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을 더 찾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을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0-12)
[출처: 박진호 목사님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