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배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제란 말을 인간적인 두려움의 안전한 피신처로. 다르다거나, 틀리다거나, 불안하다거나 하는 등의 인간적 욕망의 좌절과 안정적 삶의 파괴에 대한 두려움을 수반 할 때 사용합니다. 그래서 배제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 몸의 세포들이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외부로부터 새로운 바이러스나 세균이 들어오면 반응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배제가 늘 안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능사만은 아닙니다.
세포가 가끔은 포용을 생존의 방식으로 선택하듯 우리도 배제만큼 포용을 삶의 방식으로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공동체의 삶을 체득하지 못한다면, 어떤 공동체도 시대의 변화와 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문화적 교류와 신체적 접촉이 공동체의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고립이나 배제보다 포용이 훨씬 안전하고 바람직한 반응일 수 있다는 점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때로는 공동체 모두의 필요가 아니라, 공동체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해 배제가 포용보다 먼저 고려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성경에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하시는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어쩌면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 줄 축복에 대해 말씀하실 때,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했다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면서까지 선택받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릇된 열정과 정의감을 제어할 수 있는 신앙적 자세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인간적 욕망과 집단의 정의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열심만이 최선이던 시대도. 정해진 목적에 매진할수록 형편과 처지가 달라지던 시대도, 막을 내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배제보다 포용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열정에 앞서 차분히 돌이켜보는 습관, 시간이 걸려도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태도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오신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나사렛 사람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자기들 정의감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김병규 칼럼]자기 정의감에 희생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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