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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늘 작심삼일이었던 새벽기도를 다시금 시작하려는데 새벽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습니다. 사실 새벽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언제든 기도해도 중심만 바로 서 있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같은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20년의 신앙생활의 철없는 기도 생활을 돌아봐도 다른 어떤 시간보다도 새벽기도만큼 은혜의 기도시간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이것이 순전히 제 주관적인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새벽기도는 뭔가 특별한 주님의 은혜가 있는 것인지요? 외국에도 우리나라처럼 새벽예배 또는 기도가 활성화되었는지, 미국 등 외국 현실도 듣고 싶습니다.

[답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한국교회가 성도들에게 새벽 기도를 독려하며 드는 근거 구절입니다. 예수님도 하루가 시작하는 새벽에 기도를 하셨으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조금 따져볼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하루가 시작하는 시점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아시다시피 저녁 해가 지는 시각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날 해가 지는 때까지를 하루로 칩니다. 그러니까 새벽은 아무리 일찍이라도 새 하루가 시작해서 한참이 지난 때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입장에서 새날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려면 해가 질 때에 기도했어야만 합니다.

본문 바로 앞의 32절은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라고 말합니다. 새날이 시작되고도 병자 귀신들린 자들 치유하느라 많이 바빴습니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33절) 아마도 한 밤중까지도 정신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럼 주님은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에 다시 일어나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본문 35절이 독립된 구절이라 해도 사실상 주님의 매일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경우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하고자 새벽기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도무지 기도할 틈이 없어서 제자들이 일어나기 전에 제자들과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곳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또 다시 제자들이 주님을 그곳까지 찾아와서 사람들이 꼭두새벽부터 많이 몰려왔다고 전합니다.(36,37절)

그 때 주님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38절) 지금 온갖 중병환자들이 고쳐달라고 몰려왔는데도 주님은 아주 냉정하게 뿌리치고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마을에선 이미 전도했지만 아직 전도하지 못한 마을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질병치유 같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주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직 죄를 사해주는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 왔고 또 그 천국복음을 사전에 전파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새벽에 기도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주님이 언제든 말씀만으로 당신의 권능으로 가능합니다. 이 땅의 자기 백성들이 목자 잃은 양떼처럼 영적으로 미혹되어 있음을 안타까이 여기며 당신이 누구인지 알리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기도였습니다.

본문의 이런 의미를 우리의 새벽기도에 적용해 봅시다. 우선 새벽에 기도해야 하느냐, 어디서 기도해야 하느냐는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의 일들에 방해 받지 않고 오직 주님과 일대일로 깊은 교제가 가능한 시간과 장소를 자신의 형편에 적합하도록 택해서 기도하시면 됩니다.

현실적으로 그러기에 가장 좋은 방안이 새벽에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또 약간의 강제성이 가미되어야 쉽게 나태해지는 습관에 빠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고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독방에 들어가 게으르지 않고 성실하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스마트폰과 TV와 집안 식구들과는 완전히 격리되는 시간과 장소만 마련하면 됩니다.

새벽기도의 우선 목적은 자발적으로 시간을 따로 떼서 한적한 곳에서 간절히 기도하려는 것입니다. 작금 한국교회는 이를 설교와 찬양대까지 있는 교회공식예배로 구성하여 성도들에게 반강제로(?) 참여를 독려합니다. 엄격히 말해 새벽예배이지 새벽기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두고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정말로 새벽기도를 장려하려면 다른 것에 구애받지 않고 기도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마련 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대인들과 다르게 날짜를 계산하기에 새벽기도는 당연히 새날을 위한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새 하루의 일과를 비록 전날 저녁에 이미 시작했었지만 그날 낮에 할 일을 위해서도 분명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제대로 기도할 틈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에게는 매일의 새벽기도가 공식행사처럼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역을 성부 하나님께 인성으로는 기도를, 신성으로는 상의를 해서 시행했습니다.

요컨대 주님은 쉴 새 없이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사역을 하시면서도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따로 무릎을 꿇고 경건한 마음으로 바꾸고 평소에 해결 안 된 문제들을 따로 기도 제목으로 뽑아서 아주 거룩하게 기도해야만 기도라고 여깁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성부 성령 하나님과 교제 상의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 기도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 안 되는 위급하고 중요한 일만을 두고 기도해선 안 됩니다. 우리 식의 기도에 대한 개념과 방식으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을 도무지 지킬 수 없습니다. 성경에 신자가 지킬 수도 없는 얼토당토 않는 권면을 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목표를 높이 잡아서 그 반이라도 달성하라는 계략도 없습니다. 신자라면 실제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란 시간과 장소와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하나님에게 나는 할 수 없으니 이 일에 주님의 권능과 은총이 임하기를 소원하다는 간구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간단하게 속으로라도 도와주세요라고만 하면 아주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냥 간단히 주님 이름만 불러도 됩니다.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주님의 긍휼 없이는 실패로 끝날 수 있음을 겸허하게 시인하는 것이 믿음이기에 아무리 작은 일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기도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모든 일을 그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또 그 결과로 그분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까지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이 어떤 목적과 계획을 갖고 있는지 살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깊이 묵상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란 그분의 뜻과 계획에 맞추어 자기 뜻과 계획을 조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항상 생각하고 또 신자로서 범사를 어떻게 행할지 자기를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기도입니다. 단순히 마음속으로 소원하는 것, 꿈꾸는 것도 기도에 해당됩니다. 시편 기자도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라고 부르짖었지 않습니까?

따라서 신자가 기도에 대해 가장 먼저 주지해야 할 일은 기도의 방식, 내용, 의미, 목적이 아닙니다. 위급한 일뿐 아니라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길 간절히 소원하며 쉬지 말고 간구하고 그분의 역사를 겸허하게 기다릴 수 있는 기도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또 일단 기도자가 되면 기도의 형식과 시기와 장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기도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새벽 미명에만 기도하여서 신자더러 새벽기도의 본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기도자로 이 땅의 생애를 시작하고 마감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별도로 따로 시간과 장소를 구별한 새벽기도에는 어떤 자세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의 문제들은 삶의 현장에서 고난을 헤쳐 나가면서 항상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새벽기도에는 중요하고 위급한 문제는 계속해 기도해야겠지만 무엇보다 평소에 기도하지 못했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못했던 기도란 바로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씻어주고 또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 확장되어서 주 예수님의 이름만이 높여지는 일들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예수님은 새벽기도를 마치고 다음 동네로 전도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그럼 바로 직전까지 다음 동네 전도를 위한 기도를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신자도 이 땅의 타락한 죄악상이 성령의 역사로 깨끗케 되고, 또 아직도 사탄에 미혹된 불쌍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나아가 성도들과 힘을 합해 주님 피 값으로 사신 그분의 몸 된 교회가 순전한 복음 위에서 말씀과 능력의 공동체가 되도록, 인간 세상의 역사와 특별히 이 세대의 영적 흐름을 주님 뜻대로 거룩하게 이끌어 가도록 등등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 단순히 자기 일신상의 안녕과 형통을 위해서 기도하려면 구태여 새벽기도에 열심을 내고 동참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는 새벽기도회 자체가 없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맞벌이 부부가 많고, 회사들 출근시간이 대체로 빠르며(오전 7시- 오후3시 근무), 맞벌이가 아니더라도 대중교통이 불편해 엄마는 아이들 준비시켜서 학교에 차로 태워줘야 하는 등등 새벽에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이는 문화적 차이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가 더 큰데 이들에게 기복주의적인 신앙은 몇몇 교단들 빼고는 교회에서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신에 삶에서 신자답게 살아가는 순종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다른 말로 새벽에 개인적인 위급한 일로 구태여 교회에 따로 모여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첨언]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 내지 새벽예배가 갖는 장점은 아주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되는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사정이 허락되는 성도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새백기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장려 권면되어야 합니다. 

단 너무나 기복주의적인 개인의 일상사기도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쉽다는 뜻입니다. 샬롬!

[출처:박진호 목사님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