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절대선'이 없다. 그건 하나님의 특성에서나 볼 수 있다. 바둑돌처럼 흰색(白)과 검은색(黑)을 놓고 분류하라면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렇지만 실제 상황은 회색지대의 띠(band)로 된 스펙트럼이다. 흰색 종이 위에다 놓으면 검은 색이 되고 검은색 바탕 위에 놓으면 흰색이 된다. 그러니까 좀 더 검은가? 좀 더 흰가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약간은 흠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사람을 대해야 편안하다. 또 이해와 용서, 용납과 협조가 가능해진다. 완전히 둥근 두 통나무를 한데 붙이긴 어렵다. 이쪽 나무도 조금 깎아내고 저쪽 나무도 조금 깎아내서 두 나무의 접촉 면적을 넓게 만들어야 한데 붙일 수 있는 것이다.
내 다리는 다 뻗고 상대방은 오므리고 앉으라 하면 안 된다. 상호 공평한 관계의 대표가 '가위 바위 보' 게임이다. 양편 누구도 더 유리하거나 더 불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이길 수 있고 한 번 질 수 있도록 고안된 게임이다. 이런 기조 위에서 사람을 대하거나 어떤 일을 처리하면 관용과 포용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역사적 예를 찾아보자.
①영국 수상 처칠은 히틀러와 타협적이었던 체임벌린 수상을 맹렬히 비난해 왔다. 그리고 체임벌린 수상은 그런 처칠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철저히 눌러왔다. 뿐만 아니라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을 때도 처칠이 후임 수상이 되는 것을 그 누구보다 싫어했다.
그러나 수상이 된 처칠은 온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된 체임벌린 수상을 옹호했을 뿐 아니라, 자기 전시 내각의 일원으로 참여시켰다. 일부 하원의원들이 체임벌린에게 전쟁이 일어나게 된 책임을 묻는 청문회를 열자고 주장하자. 처칠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만약 우리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미래를 잃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현재 우리가 걷고 있는 전임자와 후임자 간의 갈등과 '적폐청산' 작업들을 생각게 한다. 정치보복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왜냐면 모든 '현직 지도자'는 언젠가 '전임 지도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후임자에게 청산 대상으로 다뤄진다면, 역사는 전진할 수 없다.
과거를 청산하려다 미래를 놓치게 된다. 달 보라고 손가락질 했더니 손가락만 바라보다 달을 놓쳐버린다. 모든 기관과 직장의 전임자/후임자 관계에서 볼 수 있고 경험하는 일들이다.
②위(魏)나라의 문공(文公)이 어느 날 신하들을 모아놓고 한 사람씩 "내가 훌륭한 임금이라 여기는가?"고 물어나갔다. 신하들은 차례차례 "과연 훌륭한 임금님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한 신하가 "훌륭한 임금이 못 되십니다. 전하께서는 이따금씩 큰일과 작은 일의 판단을 그르치고 계십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문공의 얼굴빛이 붉어졌다.
그 신하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인물을 잘 못 보실 때도 있습니다." 이 말까지 듣자마자 노기충천한 문공은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호통을 치고는 궁정에서 그를 내쫓아버렸다.
문공은 노기가 풀리지 않은 채 그 다음 자리에 앉아있던 임좌(任座)에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임좌는 거침없이 "훌륭한 임금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다소 마음이 풀린 문공은 그 이유를 물었다.
임좌는 "훌륭한 임금이시기에 아까처럼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거침없이 직언하는 신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나쁜 임금이라면 그런 직언을 하는 신하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문공은 이 말을 듣자, "과연 잘 말해줬다"며 뉘우치고 자신이 내쫓은 신하를 다시 불러들였다.
이렇게 행복한 결과로 일이 끝났지만, 문공만 한 지도자가 어디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공직자들의 취임 인사 편지를 보면 끝부분에 지도편달(指導鞭撻)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지도편달을 하면, 그와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냉각돼 버린다.
충고나 직언(忠諫)은 하는 이도 어려운 일이지만, 듣는 이가 대단한 내공과 하해 같은 성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대개의 사람은 "너 잘났다"는 소리만 원하지, "고쳐야 한다"는 소리를 싫어한다(홍사중의 지도자론에서 발췌).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