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일제 35년간 한국교회가 일제와 투쟁한 내력을 소개했다. 이번 회부터는 한국 교회의 조직과 일제로부터 받은 수난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한국 교회의 성장은 괄목할 만하게 진행됐다. 특히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교회의 성장을 빠르게 증진시켰다. 일찍이 언더우드는 자기 집에서 고아들을 모아 교육시키면서 앞으로 신학교를 세울 뜻을 세웠으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신학교는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시작됐다.
1901년 평양에서 사역하던 마펫(S. A. Moffett, 馬布三悅)은 자기 집 사랑방에서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였던 김종섭, 방기창 두 사람을 데리고 같은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리(G. Lee)와 함께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효시다. 평양 장로회선교부는 6인의 신학교육위원을 두어 ‘신학반’(theological class)를 지도하게 했고, 1902년에 신학교육은 5년간 실시하는 것으로 결의했다. 1903년에는 조사(助事, Helpers) 양성을 위한 특별 과정을 둘 것을 채택했다. 1904년에 위원회는 다른 선교부에 신학교육을 위한 교수요원 지원을 요청하여,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 남장로교회의 전킨(W. M. Junkin), 캐나다 장로교회의 푸트(W. R. Foote) 등이 평양을 오르내리며 교수하기 시작했다. 평양에 거주하는 선교사들 중 베어드(W. M. Baird), 스왈른(W. L. Swallen), 번하이셀(C. F. Bernheisel), 불레어(W. N. Blair), 웰즈(J. H. Wells) 등이 출강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최초의 한국인 교수 남궁혁(南宮爀)과 박형룡도 가르치기 시작했다.
신학반이 시작된 이듬해인 1902년에는 신학생들이 6명으로 늘어났고 1904년에는 19명, 그리고 1905년에는 3학급이 되면서 학생 수가 40명으로 늘어났다. 1년에 3개월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9개월은 자기가 맡은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숙제를 하고 자습하는 방법으로 5년간 학업을 진행했다. 신학교는 차차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1905년에는 8명의 3학년 과정과 14명의 1학년 과정이 운영되었으며, 1906년에는 50명의 학생이 등록했고 3학급이 운영됐다. 1915년에 등록학생 수가 250명이 넘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신학교’라는 말을 들었다.
1907년 6월 20일에 드디어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 때 졸업한 학생은 길선주(吉善宙), 방기창(邦基昌), 송인서(宋麟瑞), 한석진(韓錫晋), 이기풍(李基豊), 양전백(梁甸伯), 서경조(徐景祚) 등 7명이다. 첫 졸업생이 배출되는 때를 맞추어 신학교는 4개 장로교 선교부의 정식 허락에 의해 ‘대한장로회신학교’(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Korea)라는 공식 명칭을 갖게 되었다.
교장은 신학반을 신설해 그때까지 관리해 온 마펫이 맡았다. 그는 1924년 나부열(S. L. Roberts)이 교장직을 계승할 때까지 한국 장로교회 신학훈련에 지울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
신학교 졸업생들을 목사로 안수하기 위해서는 노회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한국에는 노회가 없었으므로 이들에게 안수하기 위해 노회 창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남·북 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 그리고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에 노회를 설립할 것을 합의하고, 본국 교회의 허락을 받아 한국에 노회 설립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38명, 한국인 장로 40명, 도합 78명이 모여 창립 노회를 개최했고, 첫 노회장에 마펫 선교사가, 부회장에 방기창 목사가 선출됐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그 산하에 목사 7명, 장로 53명, 교회 989개, 세례교인 19,000명, 전체 교인 70,000명을 둔 교회로 당당하게 출발했다.
한국에 나와 선교하던 감리교회는 북감리회, 남감리회가 각각 교단을 형성하여 두 개의 감리교회로 나뉘어 활동하다 1930년에 이르러 남북이 합동했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미국 남·북장로교회뿐만 아니라 캐나다, 호주 장로교회까지 모두 합해 하나의 장로교회를 형성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노회는 이 교회가 고백해야 하는 신앙고백 즉 신조를 채택했다. 그것은 인도 자유교회가 1904년에 창립하면서 채택한 12신조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선교사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인데, 이들은 그것이 앞으로 아시아 각국 장로교회의 신경이 되어 각 교회가 서로 연락하는 기관이 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였다 했다. 이 점에 관해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였던 브라운(G. T. Brown)은 1962년에 ‘한국 교회가 인도 교회 신앙고백을 채택함으로써, 서방의 선교회와의 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형제 교단과도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긍정적 평가를 했다.
그러나 이는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교회가 선교 받은 지 20년, 복음과 접한 지 반세기가 지나, 새로 형성되는 노회에서 우리의 말과 정서가 깃든 우리의 신앙고백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선교사 주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교회의 한계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2신조는 철저하게 캘빈주의 신학 입장을 따르는 신조로서,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죄의 대가, 성령의 아버지와 아들로부터의 나오심, 예정론, 불가항력적 은사, 성례전의 신앙, 육신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내포하고 있다. 이 신조는 전통적인 장로교회의 신조로 흠이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교리가 폐쇄적이어서 다양한 신학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 놓지 않아, 앞으로 교회 안에서 다른 신학 사조가 들어올 때 그 분파의 가능성이 내포돼 있었다. 다시 말해 정통 장로교회가 수용할 수 없는 신학이 도래될 때 필연적으로 교회가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