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지 못한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제사장들의 재산목록 1호가 하나님이었던 것을(민 19:20, 각주참조) 생각하면,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분명히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하나님만으로는 우리의 실제적인 생활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우리의 삶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두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삶 속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능력, 즉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 흔적이 신앙생활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는 거의 대부분 우리 앞에 가로막혀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수단으로 구해서는 안 된다. 이 원리는 나중에 알게 된다. 처음에 하나님을 찾을 때는 목적이고 수단이고 가리지 않고 코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는다.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세상 속에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감각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을 만날 때에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단으로 구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바른길로 간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살펴보고, 성경 속에서 일하셨던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이것이 곧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한다. 성경의 인물들은 삶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서 그 조상들이 어떻게 행동하였는가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찾았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성경에서 일하셨던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방법이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삶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왔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일하셨던 그 하나님을 교회를 통해서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답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교회에 들어와서 문제의 해답을 찾는데,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없고 세상적인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 이것이 교회인가를 묻는 것이다. 세상에서 해결 받지 못한 삶의 문제를 교회에서도 해결 받지 못하고, 그저 잘 될 것이고 앞으로 풀릴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말만 하고 있다면 교회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고 그 전능하심은 어떻게 된 것인가?
-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과 동행을 할 수 있는가?
-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가?
-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 교회가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를 인도했던 그들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신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교회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뵐 수가 없고 만날 수가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가 이렇게 비정상적인 현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당연하고 옳은 것처럼 말하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교회가 잘못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르는가?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방법, 즉 '어떻게'를 가르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했던 것은, 단순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었고, 신앙생활을 성경의 가르침을 공부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삶에 적용시키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서 동행하는 것 그 자체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가식이고 위선이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왜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지 못한가?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못한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삶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만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 충분하지 못하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에 무엇 때문에 세상의 프로그램이 들어오고, 세상의 학문이 들어오고, 세상의 시스템이 들어오는가? 왜 세상의 방법들이 교회에 들어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가?
-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가? 무엇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가?
- 왜 성령님의 능력을 의심하는가? 무엇이 성령님의 능력을 의심케 하는가?
- 왜 하나님의 인격에 대하여 회의적가? 무엇이 하나님을 인격 파탄자로 만드는가?
이러한 내용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이 왜 심각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는 우리는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것인가? 우리는 지금 처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께서는 생활의 문제가 영혼 구원의 문제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영혼의 구원은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지식적인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 속에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앙생활, 즉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믿음에 터를 둔 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 회복을 원하시는 것은 깨어진 에덴동산의 복원을 바라시는 것이다. 다시는 눈물이 없고 애통함이 없는, 완전히 회복된 상태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곧 영혼의 구원이다.
영혼 구원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영생의 보장 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죽이신 이유가 무엇인가?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하는데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것인가?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데도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인가를 반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방식은 찾아볼 수가 없고 인간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인가? 그저 믿는다고 하면 구원을 얻는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 속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영생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교회의 거짓신앙에는 더더욱 맡길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할 때이다.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때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해결된다. 주님께서는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낫는 것을 즐거워하지 말고 하늘에 기록된 것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눅 10:20, 각주참조) 하늘에 기록된 그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 가치를 알기 위해서 신앙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신앙의 본질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왔다.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한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함께한 생활이 아니었음을 나중에 어떻게든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주님 앞에 가서 알게 된다면 끔찍한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입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삶 속에서 주님의 능력을 매일매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 심각함을 깨달아야 할 때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충분하지 않다면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 이유를 찾는 것이 거짓신앙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영생을 얻기 위해 첫 발을 내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못한 그 이유를 찾아 삶을 조정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누려야 한다.
2.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지 못한 이유
하나님만으로 삶의 모든 것이 충분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은 당연히 들을 수가 없다. 이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은 신앙생활도 아니고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이방인의 생활 그 자체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방인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만으로 충분하겠는가?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이방인의 삶은 하나님만으로 충분할 수가 없다. 그들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세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모른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먹이신 그 하나님을 모른다. 애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었듯이 세상 속에서는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만으로 충분할 수 없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교회에 세상의 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은 이 충분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면 세상의 어느 것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든 개인이든 마찬가지이다. 만약, 당신이 먹을 것이 없고 차비가 없고 쓸 것이 없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말고, 어느 누구에게도 부탁하지 말고 오직 주님에게만 기도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신앙인일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당신은 앞으로 그리스도인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삶의 모든 필요를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다.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만 의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선각자들도 그렇게 하였다. 조지 뮬러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해결 받지 못한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주님만으로 충분하여야 한다.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여야 한다.
3. 평신도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평신도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평신도들이 교회를 나올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나오는가? 평신도의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평신도를 인도함에 있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를 생각하는 것은 참 신앙의 회복을 위해서 시급한 주제이다. 평신도는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들이 교회에 나오는가? 그들은 자신의 어떤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교회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각주참조) 평신도들이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가를 리더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고려해 주어야 할 것이다.
- 그들은 교회의 외형에 관심이 없다. 예배의 치장에 관심이 없다. 예배의 순서에도 관심이 없다. 대표기도의 내용에도 관심이 없다. 예배를 통하여 충분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무르기만을 원한다.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 삶의 문제가 예배를 통하여 해결되기를 원한다. 예배를 통하여 병이 낫기를 원하고 귀신이 떠나가기를 원한다. 성숙되지 못했다고 말하든 말든, 고상함을 떠나서 낫기를 원한다. 그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접촉을 원한다.
- 그들은 긴 시간 하나님께 집중하기를 원한다. 일방적으로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한다. 그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은 혐오한다. 광고나 새 신자 카드 작성, 모임에도 관심이 없다. 이런 것들로부터 하나님의 관계에 방해받지 않기를 원한다.
- 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체험하고 그것을 찬양하기를 원한다. 그저 따라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온몸으로 기뻐 찬양하기를 원한다. 찬양 가운데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된 찬양을 하기를 원한다. 찬양의 가사가 마음에 파고들어 찬양을 하면서 목이 메어 꺽꺽거리면서 부를 수 있기를 원한다.
- 그들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나의 삶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원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원한다. 그 사랑을 느끼기를 원한다.
- 그들은 영적 은사에 대한 교리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교리적으로 살고 그 체험을 나누기를 원한다. 그 나눔을 통해서 듣는 이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계시에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원하고, 그 열매가 어떻게 삶에서 나타나는가를 알기를 원한다. 어떤 사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어떤 결과가 있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 그들은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 한 시간 예배를 드리고 일주일을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고 주일예배를 통하여 더 많은 기름부음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한다. 이러한 예배를 통하여 영적 배부름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영적 허기짐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삶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표적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삶 가운데 믿는 자의 표적이 나타나기를 원한다.
- 그들은 교파와 교단에도 관심이 없다. 교단의 문제로 왜 싸우는지도 모른다. 교파 사이에 헐뜯는 비방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기름부음이 있는 사역에 교파를 초월하여 모여도 평신도들은 싸우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영적 허기짐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하나님의 임재에 감사할 뿐이다. 나의 영적 허기짐을 면하면 주위의 허기진 사람들을 생각하고 테이프 한 개라도 구한다. 그리고 전철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돌아가서 생각했던 사람에게 건네준다.
이들을 더 이상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들을 더 이상 교리의 틀 안에 가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는 이들에게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어떻게'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는 이들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삶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이상 성경책 속의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직접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 이유는 더 이상 망가진 삶을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거짓신앙 속에서 누적된 피로 때문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든 만날 것이고 지금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볼 것이다. 지금의 생활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종교에 불과한 그 교회를 뛰쳐나갈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형식적인 거짓신앙에 물들어 죽어갈 것이다.
이들의 관심사를 충족시켜주기를 원한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직접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은 주님과 손잡고 가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자신이 동행하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동행하라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영적인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변명하거나 합리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평신도의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현실이 비참하고 통탄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스스로 확인하여야 한다. 목자가 양들을 곁길로 가게 하였으면 스스로라도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지옥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리더가 잘못될 수도 있다. 리더가 잘못 알 수도 있다. 그들이 소명자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을 탓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그 나물에 그 밥인데 어디서 참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는가? 나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빠를 것이다. 참 신앙의 본질을 찾고 주님과 동행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다시는 그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카멜레온 같이 수없이 변하면서 양들을 노략질하는 늑대들의 실체를 분별하고 분별력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모든 것들은 겸손한 자세로 주님께 맡기고 그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신도의 관심사를 외면하지 말라. 지각 있는 자들은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처: 회복시리즈 02. 신앙의 본질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