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 교회가 시행한 경제적 항일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다. 일제는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한 후 금융을 독점하였고, 자기들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었다. 도로를 신설, 보수하고, 고용인들의 인건비를 지출하기 위해 열악한 재정 상태였던 조선 조정에 차관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진 빚을 갚아야 독립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선각자들 사이에서 국가의 빚을 갚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을 일컬어 국채보상운동이라 한다.
이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경북 대구다. 출판사 광문회(廣文會)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 기성회를 조직함으로 비롯되었다. 이 운동은 주로 금주, 금연운동이 주축이었다. 노동자 중심으로, 외채를 진 것은 민족의 수치일 뿐 아니라 결국 경제적 몰락을 면치 못할 것이란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이 운동이 시작되자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여러 언론기관들이 이 사실을 집중 보도하였다. 이에 따라 모금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각지에 지회가 조직되어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진 빚이 1906-7년 동안만 해도 1,300만 원에 이르렀다. 이런 빚을 지고는 국가가 결코 자주독립을 할 수 없다며,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이 빚을 갚아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빚을 2천만 국민이 3개월간 금주, 금연하여 모은 돈으로 갚자는 취지였다.
이 운동은 초기부터 금주, 금연을 교인들의 엄격한 신앙생활 훈련으로 실천해 온 교회의 지침과 맞물려 교회는 애국운동의 한 방편으로 이 운동에 적극 나섰다. 국채보상운동 본부를 서울 YMCA에 설치했다. 교회는 사경회, 강연회, 토론회, 음악회 등을 통해 교인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에 호응하여 전국 교인들이 헌금을 보내와 이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 운동에 호응하여 여러 기독교계 단체들이 구성되었다. 서울여자교육회, 진명(進明)부인회, 대한부인회 등을 비롯하여 지방에서도 선천 의성회(宣川義成會), 안악 국채보상탈환회(脫環會), 제주도의 삼도리(三道里)부인회 등이 결성되었다. 고종 황제까지 이 운동에 호응해, 친히 담배를 끊고 보상금을 하사해 주었을 뿐 아니라, 고급관료, 지식인, 상인, 인력거꾼, 기생, 백정 등 하층민에게까지 확산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여성 중심으로 벌였던 운동이 있었는데, 이것이 탈환회다. 탈환(脫環)이란 글자 그대로 ‘반지를 뺀다’는 의미다. 국채보상을 위해 반지를 빼어 바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의 방법과 의의를 취지문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우리 각 사람이 몸둔 곳은 나라이라.……나라 한번 망하고 보면 당상(堂上)에 늙은 부모는 장차 어느 곳에 장사하며 강보의 어린 아이는 장차 뉘의 종이 될는지요.……국채 1,300만 원을 갚을 방침은 우리 동포 마음에 있는 줄 압니다. 대범 2,000만 중 여자가 1,000만이요, 1,000만 중 지환 있는 이가 반은 넘을 것이니 지환 한 쌍에 2원씩만 셈하면, 1,000만 원이 여인의 수중에 있다고 불 수 있으니……깊이깊이 생각하면 못 할 일이 아니오니 어서 속히 결단하여 지환을 바침으로 국채를 갚는 날은 나라의 행(幸)이요 생명의 행이외다.”
또한 패물폐지(佩物廢止) 운동도 일어났는데, 그 취지서를 보면, “……2,000만 [인구] 중 1,000만이 여자가 될 터인데 저마다 전재(錢財)는 충족하지 못하나 3원 이상 값이 되는 금, 은 패물 등속은 있을 터이온 즉 갹출하면 3,000만 원 가량이라. 1,000만 원으로 국채보상, 1,000만 원으로 은행설립, 1,000만 원으로 학교를 창설하면 조국에 이익 됨이 소소한 패물에 비하리오.……패물이라는 것은 매일 소용되지 못하고 의장 속에 일 푼의 이식(利息)도 생효치 않고 혹시 차고 보면 심히 무겁고 옷을 상하니 없어도 무방할 것이외다.……우리 국민이 남의 빚을 산같이 지고 패물을 차는 것은 발가벗고 은장도 차는 격이라 발기인 일동은 약간의 패물을 연조하여 패물폐지회를 조직, 취지를 선전하옵니다.”라 하였다.
이렇게 교회 여성들이 패물을 모아 나라의 부채를 갚고 은행도 설립하고 학교도 세워 국가의 내일을 기약한 일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모아진 성금은 1908년 5월까지 모두 231만 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제가 이런 시민운동을 그대로 방치할 리 없었다. 이를 항일운동으로 간주한 저들은 이 운동을 저지할 목적으로 이 성금의 일부를 보관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양기탁(梁起鐸) 등 여러 지도자들에게 공금을 횡령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재판에 회부하는 일을 자행하는 등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이 운동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합법적이고 복음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투철한 정신을 보여 주는 한 대목이다.
여성들은 또한 감선회(減膳會)를 조직했다. 감선이란 식사 때, 반찬을 줄여 먹는 일을 말한다. 감선은 본래 국난을 당했을 때 임금이 삼가고 절제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반찬 수를 줄인 것을 말한다. 교회는 이 운동을 일으켜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에서 교인들이 사치스럽게 찬을 여럿 놓고 먹는 것을 경계하고 절약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부산 사천리에서 조직한 감선회의 취지문에,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지라. 외채 1,330만 원을 갚지 못하면 우리 대한강토 삼천리를 보존키 어려워라.……충군애국지심이 어찌 남녀가 다르리요. 우리가 살림을 절용하여 조석 반상기에 매일 3∼4푼만 감하여도 일월지간에 남는 것이 신화(新貨)가 10전 가량이나 될 것이니 다소를 불구하고 성심 협력 국토를 안전히 하옵시다.”라 하여 여인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진솔하게 표현하였다.
이런 여러 운동은 백성들 스스로, 기울어져 가는 국가의 운명을 구하려는 힘겨운 몸부림이었다. 이런 운동이 비록 국가를 구하지는 못 했지만, 국가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