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良心)'이란 선악을 판단하고 선을 명령하며 악을 물리치는 도덕 의식입니다. "한 점 양심의 가책이나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듯, 자기가 행하거나 행하게 되는 일, 특히 나쁜 행위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양심은 헬라어로 '쉬네이데시스'라고 하며, '쉬'라는 말은 '함께', '네이데시스'는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쉬네이데시스는 '함께 같이 본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사는 모든 인류는 함께 같이 보았습니다. 무엇을 함께 보았느냐,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때문에 일말의 양심을 통해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우선 나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양심이란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이며, 크게 3가지로 분류됩니다. 먼저 '두 개의 서로 다른 마음', 둘째 '겉 다르고 속 다른 마음', 셋째 '심성을 수양함'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속담 중 '귀 막고 아웅, 눈 감고 아웅한다'는 것도 있고, '그 사람은 양심도 없는 사람이야!'라는 말도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한 옳고 그름, 선과 악을 판단할 도덕적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 양심은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고 할 때, 그 심상에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 율법을 이미 마음에 새긴 것입니다. 최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는 간교한 사탄의 유혹으로 그만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멀리하고, 욕망의 늪에 빠져 후손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제공했습니다.
다윗은 나단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신실하게 회개했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아 더 큰 축복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후손들에게 참 아름다운 기업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의 질문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잘 활용했다면, 그러한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브람과 이삭은 부인으로 인해 자칫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는 양심 없는 행동을 합니다. 아마도 부전자전 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은 30냥을 받고 자신의 스승이자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는 결국 양심의 가책을 느껴 괴로움으로 자살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이 슬픈 역사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후손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을 도로 갖다주면서 인간적인 양심으로 자살을 선택하기까지 그 마음이 참으로 고단했을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을 향한 회개를 선택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교회 안에 가룟 유다보다 못한 신앙인들이 많다는 사실에, 참으로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양들을 보호하려고 애쓰며 양들의 억울함과 양들의 고통을 함께하고 위로해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양들을 내쫓는 교회가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놀랍기도 하며 슬프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지금은 박해를 받는 로마 시대도 아니고 오직 은혜를 누리며 행복을 누려야 할 때인데, 오히려 신앙인들이 로마 시대보다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범하고 살고 있는 것이 정말 놀라울 뿐입니다.
목사는 재판장이 되어 양들을 재판하고 출교시키려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은 다른 교회로 가라고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자신과 코드가 안 맞는 신자들에게 "다른 교회로 가라"며 양을 내몰고 있는 주의 종이 있다니,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맞는지 구별조차 무색하게 만듭니다.
강단에서도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은 사람들은 사탄이나 불순한 사람들이라고 몰아세웁니다. 이런 목사를 따르지 않는 성도들이 문서를 통해 이를 알리려 하니, 그 문서를 괴문서라고 하며 신천지에서 하는 수법이라고 강단에서 소리칩니다. 어제 했던 말과 오늘 하는 말이 전연 다르며, "나는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양심 없이 오리발을 내 밉니다.
장로와 목사 정년은 총회법상(예장 통합)으로 70세입니다. 그러나 당회원들의 합의로 후배들을 위해 65세에 조기 은퇴를 하기로 하여, 이미 8년 동안 많은 분들이 조기 은퇴를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어긴 채 양심 없는 태도로 돌변하여 꼼수를 앞세워 다시 70세로 정년을 올림으로써 교회 안에 어려움을 당한 곳이 있어 참으로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런 양심 없는 지도자들 때문에, 많은 양떼들은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불철주야 아낌없이 봉사하시는 분들에게, 시무정지와 출교를 단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마치 법원이나 검찰 같기도 합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한단 말입니까?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에게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자신들이 양심을 저버리고 빚어진 사태를 포장하면서 이리나 늑대로 둔갑하여 성도들을 내몰고 있으니, 이를 어떡합니까?
그를 추종하는 목사와 장로들은 사건의 주범들 말만 듣고 오히려 그들의 편에서 함께합니다. 당회원들 모두에 의해 생긴 사건의 경우 당회를 거치지 않고 상급기관에 곧바로 고소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이를 무시하고 반드시 당회를 거쳐야 하는 악법을 폐기하거나 수정 보완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년과 은퇴 문제로 교회에 빚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노회나 총회에서는 불구경하듯 자신들의 안위만을 추구하며 함구하고 있습니다.
법이란 약자를 보호하는데 의의가 있지만, 교회법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회법은 약자를 위해 법을 수정 보완하려는 노력이라도 하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변화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해마다 선거 때만 대면 변화와 개혁을 외치지만, 노회나 총회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 양심 없는 태도로 돌변합니다. 목사님들이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아야 하는데, 오직 자신들의 잇속만 차리려다 보니 법은 개정되질 않습니다.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는 모세가 힘겨운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제도를 만들어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 것을 제안해 이를 실시하므로 모세의 과다한 업무가 해소됐으며, 오늘날 조직과 인사제도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왜 모르시는지요,
지금 사회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오늘날 교회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탈피하지 못하면서 타종교보다 뒤떨어져 가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부흥을 원한다면, 먼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신앙과 함께, 자신의 많은 학문과 자랑거리는 모두 배설물처럼 여기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강단에서 설교만 이렇게 외칠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 모두가 함께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죄를 짓기 전, 필터의 역할을 하는 아주 중요한 기능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그 양심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죄를 생산하며, 거침없이 자연스럽게 도모합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있어야 합니다. 가책 없는 양심은, 죄 짓는 일에 감정 없이 무감각한 상태로 돌변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이라면 더더욱 신앙양심을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 나를 내려놓고, 이웃 간에 필요 없는 고집과 아집을 버리며,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양심을 통해, 교회 안에서부터 세상 끝까지 주님의 아름다운 신앙양심을 이웃과 세상을 위해 내뿜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양심으로부터 구속되어, 나 자신부터 하나님과 성도들의 신실한 종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