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마음이 멀리 떨어져 사는 부부가 많습니다. 내 마음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서 각 자 외로운 섬이 되어 살 수도 있습니다.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주신 새생명을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지 않을까요? 부부간의 갈등, 집단간의 소송, 국가들간의 충돌, 심지어 교회문제까지. 우리는 각 자 자신이 처한 입장이 있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해보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려는 태도보다는 각 자 자신의 입장만을 제시하고, 상대방이 내 마음을 이해해주기만을 바라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 교회 주변 미국 가정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부부가 크게 싸움을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고성과 욕을 했지만, 어느 한 쪽도 들으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귀머거리가 아니지만, 조그만 갈등만 생겨도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대방의 말을 듣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계3:17)는 주님의 이 말씀을 나에게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고, 우리는 논쟁을 피하고 평화롭게(?) 지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숨기고 위장하는 부부가 결혼생활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점차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가고, 한 몸이 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도 멀어집니다. 어떤 분은 자기네 부부가 정서적으로 궁합(emotional incompatibility)이 맞지 않는다고, 그래서 대화해봤자 소용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굉장히 그럴듯한 변명이지만 정서적인 궁합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닐까요? 모든 사람은 각 자 성장한 배경과 고유한 개성을 지녔는데, 이해하려는 마음과 사랑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 차이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테니스든 탁구든 재미가 있으려면 공 하나를 서로 상대방에게 보내고 받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상호 개방성을 가지고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내가 보는 관점을 나눌 때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오늘 내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그 사람을 이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주실까요? 살아오면서 싫어하고 미워한 사람이 내 마음에 아직도 남아있다면, 그 사람을 이해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한다면, 주님은 어떻게 도와주실까요?
우리가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연봉을 높이려는 노력보다 교육수준을 끌어올리려는 노력보다,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인 나를 이해하시려고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죄인까지 되셨습니다. 십자가 죄수의 신분, 희생제물의 위치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용기를 내고, 사랑하며, 차이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한 계단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우리가 행복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면 어떻겠습니까? 주님,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게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