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신학은 신비주의 신학에 속한 신학으로, 무한한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력 너머에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신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일까?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은 어떻게 만나고 동행할 수 있는 것일까? 철학자들에게 조차 신(神)에 대한 개념은 다루기 쉽지 않은 분야였습니다.
사람들은 초기 철학자들이 신을 부정했다고 생각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오니아 지방 밀레토스에서 시작된 철학의 출발은 자연철학(physica)이었습니다. 즉 우주의 근원은 무엇인지 연구하면서 철학이 시작되었지요. 지금으로 말하면 이론물리학 유사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이론 물리학자들이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고대 헬라 철학자들도 만물의 근원은 불이며 그 만물은 변한다고 본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주전 5-6세기)처럼 종교를 경멸하는 철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시인이며 철학자였던 크세노파네스(Xenopanes, 주전 580경-480경)처럼 신이야말로 유일하고 불변의 존재라고 본 철학자도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은 신은 인간의 지식과 본성을 초월한 존재로 인간 오성 너머의 숭고한 존재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쉽지 않고 반대로 '신은 이러이러한 존재는 분명 아니다'라는 파악 방식을 제시하게 됩니다. 여기서 시작된 종교철학 분야가 바로 부정신학입니다.
이 같은 부정신학의 기원은 기독교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카고대의 버나드 맥긴은 서방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를 다루면서 서방 기독교의 신비주의가 3, 4세기 시작되어 12세기까지 꽃을 피웠다고 보며 13-16세기를 신비주의의 개화기로 이때 신비주의의 고전적 학파들이 생겨났다고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신비주의는 그 역사와 뿌리가 깊다고 볼 수 있지요. 이 같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신비주의 속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합니다.
그런데 맥긴이 3세기를 기독교 신비주의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신플라톤주의의 원조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us, 175-250)의 두 제자였던 플라톤 철학의 종교적 해석의 달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겐(Origen, 185-254)과 신플라톤학파의 실제적 창시자 비기독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 205?-270)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들에게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며 현상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합일(合一)에 대한 신비적 열망이 나타나는데 플로티노스는 감각적 세계와 초감각적 세계 사이의 합일, 즉 인간의 혼은 탈자(脫自)를 통한 절대적 일자(一者)와의 합일을 이룬다고 봅니다.
이 같은 합일의 갈망은 과학기술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비주의의 근간을 이룹니다. 초월자이신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개념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지요. 이 같은 신비주의 속에는 전지전능한 인격자이신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과 플라톤적인 선의 이데아(Idea),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만유의 목적인 누스(Nous)의 개념이 혼재해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비체험가들과 신비주의자들도 이런 기독교의 하나님과 철학적 하나님을 혼동하는 체험(즉 주관적, 개인적 체험)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혼돈을 간파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유대교 출신 신플라톤주의 신학자 필로(Philo)는 앞에서도 소개했듯 신은 인간 오성(understanding) 너머에 계신 지고지순한 분이기 때문에 무한하고 이해 불가능하며 형언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이 신과 합일을 이룬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 것으로 보았지요. 신에 대해 인간이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신은 이러이러한 분은 아니다'는 식의 서술만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정철학에서 파생한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입니다. 인간의 사고 범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므로 긍정(kataphasis)에 대조되는 부정(apophasis)의 방식으로 신을 이해하려한 이 같은 방식은 6세기 아레오바고의 관원 디오니시우스(행 17:34, 僞디오니시우스)의 이름으로 저서를 유포시킨 익명의 철학자를 통해 훗날 동방정교회의 수도원 전승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졌습니다.
위(僞)디오니시우스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일체의 규정을 초월해서 선(善)이라고도 존재라고도 할 수 없지요. 신은 초선, 초 존재로 일체의 형용과 규정을 부정하는 것만이 신에 대한 이해의 길로 보았습니다. 신을 아는 자는 <무지(無知)의 지>이어야 합니다. 이 모든 <부정도(via negativa)> 또는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은 이후 오랫동안 신비신학의 방법론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과거 예배당들을 다녀보면 다양한 추상적 상징들을 교회건축에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에 대해 교회가 직설적으로 묘사할 수 없었기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재론을 주장한 스콜라 철학자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의 신학 안에도 무한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함부로 파악할 수 없다는 명제가 보입니다. 주류 신학은 아니나 이렇게 부정 신학은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아는 하나의 신학 방식이 되고 있습니다.
조덕영 목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