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은 사건 중 하나는 안중근(安重根)의 이등박문 격살사건이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 강점을 러시아에 알리고 양해를 얻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지도하던 안중근이 하얼빈(Harbin) 역에서 처치한 사건이 터졌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8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영세를 받은 천주교인이다. 천주교 신자로서 살인을 하는 행위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음 글에서 엿볼 수 있다. 판사의 질문에 그는 다음 같이 답했다.
문: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겠지? 답:그렇다.
문:그렇다면 그대는 인도(人道)에 반(反)한 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답:교(敎)에서 사람을 죽임은 그 국(局)에 있는 자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 성서에도 사람을 죽임은 죄악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살인이 잘못임을 시인하면서도 국가를 빼앗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죄악이므로 죄악을 제거했다고 천명했다. 안중근의 살상 행위가 옳았느냐 하는 문제는 다른 곳에서 다루어질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가 기독교인으로 애국적 행위를 했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지나간다.
안중근의 사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우연준(禹連俊:본명은 禹德淳)이다. 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충북 제천 사람이다. 을사늑약이 공포되자 그는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海蔘威)로 망명하였고, 그 곳에 계동(啓東)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항일의병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다 1908년에 안중근을 만났고, 의기투합하여 이등박문 암살에 합의했다. 그들은 만전을 기하기 위해 두 곳을 저격 장소로 선택했는데,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우연준이 채가구(蔡家溝)역에서 감행키로 계획했다. 그러나 아침 6시 30분에 이등을 태운 열차는 채가구에 서지 않고 통과해 오전 9시에 하얼빈에 도착한 후, 하차하는 이등을 안중근이 격살했다. 우연준이 이등을 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기차가 채가구를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안중근과 우연준, 즉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두 인사가 이 대담한 일을 감행했다. 국가를 위하는 일에 가톨릭과 개신교 교인이 연합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기독교인 강우규(姜宇奎), 이동휘(李東煇) 등도 테러 행위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일제 식민통치 기간 중 줄곧 일제 당국자들과 그 주구(走狗)들을 처단하려는 노력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사들이 단순히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사건을 기독교의 항일투쟁으로 일반화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다.
다음으로 경제적 항일이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항일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이 경제적 저항운동은 저항력이 강한 서북지방에서 빈발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저항은 조세(租稅)저항이다. 그 이유는 이곳이 기독교와 가장 먼저 접촉된 곳이고 조선조에서 백안시된 지역으로 관리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막혀, 자연히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세금부담이 많아 조세저항의 요소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그 침략의 야욕을 구체화하면서 일본 상인들이 대거 한국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요지를 헐값으로 취득, 또는 탈취하였다. 이곳을 자기들 상업 거점으로 확보하면서 영세한 한국 상인들의 시장을 침식하여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농토를 헐값에 사들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개발, 철로건설 등 갖가지 이유를 붙여 농민의 생활 터전인 농토를 강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전체 농지의 25%를, 불과 3%도 안 되는 일본인들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제의 만행이 삶의 근거를 상실한 한국인들의 저항을 가져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경제적 항일 방법 중, 가장 쉽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일반 서민들이 할 수 있었던 저항은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조세저항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평북 용천과 평남 순천(順川)에서 있었던 기독교 상인들의 조세저항이다. 1909년 4월 통감부는 시장세(市場稅)를 제정, 공포하여 징세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저항이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저항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평북 용천 양시의 시장터였다. 이 곳에서 기독교 지도자들 중심으로 시장세를 거부하는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곧 인근 각지로 퍼져 나갔는데 그 중에서도 평남 순천 지방의 저항이 가장 강렬했다. 1910년 1월 이 곳에서는 순천읍교회 장로 최봉환(崔鳳煥)의 지도로 상민회(商民會)를 조직하여 시장세 납부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후에 이 운동이 폭력화되어 일부 흥분한 상인들이 일인 상점을 부수고 방화하였으며, 급기야 일인 수명을 살해하는 사건으로까지 비화됐다.
이런 조세 저항운동은 서북 지방 여러 곳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운동은 일부 지방에서 선교사들이 뒤에서 사주하고 부추긴다는 일제의 판단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들 기록에 의하면, 함경도 경성군에서는 기독교도들이 선교사들과 합세하여 연초경작세(煙草耕作稅)와 주세(酒稅)를 거부하였고, 또 세금을 수납하러 온 징세원을 폭행하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기독교회에서 금연, 금주를 엄히 가르치고 실천한 데 기인한 것 같다. 함경북도 성진에서는 선교사 로스와 그리어슨(R.G.Grierson)의 지시에 의해 시장세를 거부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선교사들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관변(官邊) 자료 기록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일제는 적어도 기독교인들의 저항을 선교사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평가한 시각이 강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 기독교인의 조세저항에 대해 “교회에 희사금 (헌금)으로 1년에 16만 원씩이나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들이 1, 2전 하는 시장세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은 미국인들의 종용”이라며 그 책임을 선교사들에게 돌렸다. 평남 진남포에서도 통감부의 징세에 순응하는 것은 결국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 하여 기독교인들 중심으로 납세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는 당시 일본 공사관 기록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