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 윗물과 아랫물이 터져 거대한 홍수를 이루었던 노아 시대를 방불케 한다. 손가락 몇 개만 움직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엄청난 지식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범람이 땅을 기름지게 하여 작물 재배를 유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 정보의 범람이 갖는 순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의 진위를 검증할 수 있는 필터의 부재가 무엇보다 문제이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다
요즘 히브리어에 대한 그릇된 정보가 인터넷 공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본다. "히브리어는 거룩한 언어이다",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언어이다", "히브리어는 표의(表意)문자이다", 이러한 정보를 인터넷 상의 글이나 동영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
히브리어는 신비한 언어이며, 그 안에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가르치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본다. 히브리어 알파벳에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가르치기도 한다. 히브리어 문자를 한자와 같이 이해하여 히브리어 문자에서 '십자가'를 도출해내기도 하고, '못 박히신 예수'를 언급하기도 한다.
더욱 더 심각한 문제는 히브리어에 대한 그릇된 지식을 바탕으로, 히브리어 성경 본문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영향을 받아, 신학을 전혀 접하지 않은 이들조차 사실무근이며 근거 없는 정보를 이곳 저곳에서 전달하고 있음을 본다. 예수의 말씀 중 이들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말씀이 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 15:14)."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언어가 아니다
"빛이 있으라(창 1: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어떤 언어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만이 아신다"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최초로 하신 이 말씀은 적어도 히브리어나 아람어나 헬라어가 아니었다. 이 언어들은 하나님께서 바벨탑 사건 이후에 혼잡케 하여 흩어지게 만드신 결과로 생겨난 언어들이며, 그 전에는 언어도 하나이고 말도 하나였기 때문이다(창 11: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최초로 하신 말씀이 어떤 언어였는지는 물론, 아담과 하와가, 그리고 노아와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히브리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사용했던 언어인 아카드어를 사용했으리라 보는 것이 타당하고 합리적인 추측이다(창 10: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 즉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는 말씀은 아카드어로 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히브리어는 거룩한 언어 혹은 하나님의 언어"라 부르는 이들은 구약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기록됐기 때문이거나, 혹은 유대인을 하나님의 선택 받은 거룩한 백성으로 생각해 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를 거룩한 언어로 보는 시각이 생겼을지 모른다.
구약 성경의 언어이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거룩한 언어로 본다면, 부분적이지만 에스라서와 다니엘서에 기록되었으며, 심지어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아람어는 왜 거룩한 언어로 부르지 않는가? 신약을 기록한 언어인 헬라어는 왜 하나님의 언어라 부르지 않는가?
필자는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스라엘에서 18년 동안 생활하면서 유대인들과 히브리어로 대화하고, 유대 기독교인들과 함께 히브리어로 찬양하고 말씀을 들었다. 필자가 수학했던 히브리대학교에서는 히브리어로 강의를 들으며, 박사논문도 히브리어로 썼다. 이처럼 히브리어는 다른 언어들처럼 의사소통에 필요한 일상생활의 도구일 뿐이다.
극단적이고 근본적인 정통파 종교인들 중에서는 그런 편협적인 생각을 할 수 있으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거룩한 언어로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나님께서 성전의 휘장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으심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는 순간 더 이상 우리에게는 거룩의 개념이 특정 사람, 장소, 시간, 건물, 사물에 적용될 수 없으므로 특정 언어가 거룩하다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시각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어떤 언어를 사용하게 될까?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언어이기 때문에 천국에서 히브리어로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한다면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어떤 언어권의 사람이든 상관 없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필자가 히브리대학교에서 재학할 당시, 구내식당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 9명 사망, 80여명 중상의 무시무시한 테러였다. 필자도 그 식당에 있었다. 폭탄 소리가 너무 커서 양쪽 고막이 모두 터져 버렸고, 2500도 정도의 순간 온도로 전신 40%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식당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누워 있다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앰뷸런스에 실리면서 다시 의식을 잃었고, 27일 후에야 의식을 회복했다.
필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음성은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듣는 '마음의 언어'였다. 어떤 언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된다면 바람직한 도구가 될 것이고, 남을 헐뜯고 비방하거나 넘어뜨리는데 사용된다면 불의의 도구가 될 것이다.
◈히브리어는 상형문자나 표의문자가 아니다
"히브리어는 상형문자, 혹은 표의문자"라는 말은 잘못되고 왜곡된 정보이다. 만일 히브리어가 표의문자라면, 영어 또한 표의문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영어 알파벳은 히브리어 알파벳과 동일한 기원을 갖기 때문이다. '알파벳'이라는 말은 헬라어 첫 두 문자인 '알파'와 '베타'에서 나왔으며, 헬라어의 '알파', '베타'는 히브리어의 '알레프', '베트'에서 유래됐다.
히브리어 알파벳이 어떤 사물이나 모양에서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히브리어 첫 번째 문자인 '알레프'는 황소 머리 모양에서, '베트'는 집 모양에서 만들어졌으며, 나머지 다른 문자들도 어떤 사물이나 모양에서 만들어졌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히브리어를 표의문자로 착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어의 알파벳이 어떤 사물이나 모양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히브리어가 표의문자라고 보아야 한다면, 히브리어뿐 아니라, 아랍어, 아람어, 페니키아어 등 셈어는 물론 헬라어를 포함해 라틴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영어 등의 인도-유럽어도 모두 표의문자라고 해야 한다.
영어의 'NO'라는 단어를 가지고 N은 뱀의 모양에서 유래하고 O는 사람의 눈 모양에서 유래했으니 '뱀의 눈'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는가? 영어 알파벳 Q가 원숭이에서 유래했다 하여 Q가 들어간 모든 단어를 '원숭이'와 연결시켜 해석해야 하는가?
세종실록에 보면 한글이 '옛 전자'를 본받았다고 되어 있다. '옛 전자'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그것이 '가림토' 문자이든지 고대 인도의 어떤 문자이든지 아니면 또 다른 유래를 갖고 있든지 간에, 한글 문자 역시 어떤 사물이나 모양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글 역시 문자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해야 하는가?
오늘날 대표적인 표의문자(표어문자가 정확한 표현)는 한자이다. 표의문자란 한 글자가 하나의 뜻을 갖는 문자를 말하며, 그 경우 글자 수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사용되는 한자는 5천개 정도라고 하지만, 전체 한자의 수는 5만-10만개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5천 개 정도의 글자를 갖고 있어야 '표의문자'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소문자', 또는 '표음문자'라고도 부르는 알파벳은 하나의 문자가 하나의 음(자음/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언어는 표음문자인 알파벳을 가지고 있으며, 히브리어 역시 22개의 표음문자인 알파벳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알파벳이 어떤 모양에서 유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소리를 나타내는 언어 체계이지 뜻을 나타내는 언어 체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히브리어 문자에서 의미를 도출하는 시도는 매우 위험하며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많은 이들의 눈을 가려서 위험천만한 구덩이로 인도하는 것이다. 왜곡되고 터무니없는 시각에 더 이상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권성달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