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은 95개조 반박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성서 안에서 복음을 다시 발견하게 된 그의 구체적인 체험에서 이미 태동되었다. 1512년 어느 날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탑 꼭대기 골방에서 회심케 되는 ‘탑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때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을 새롭게 깨닫는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체험을 통해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신칭의(以信稱義)’라 한다. 종교개혁의 주요 슬로건이다.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는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개신교의 토대가 되는 ‘이신칭의’ 교리는 이후 잘못 해석되거나 불완전하게 이해되어 믿음과 행함이 이원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실종을 낳는 주범을 ‘오직 믿음’에서 찾기도 한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서 종종 발생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초기 교회 안에서도 바울이 전한 ‘이신칭의’를 율법 폐기 혹은 도덕 폐기로 오해했던 이들이 있었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복음과 함께 ‘이신칭의’를 가르친 바울의 신학 사상은 율법 종교에 매여 있는 이들이 볼 때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이단 사상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고 말한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을 율법 폐기로 오해한 이들이 ‘은혜 받기 위해서는 죄를 지어야겠네!’라고 바울의 복음을 빈정거리듯 말한 것에 대한 그의 해명(apologia)을 반영한다.
바울이 주장하는 믿음은 행함과는 어떤 관계인가? ‘이신칭의’는 자칫 개신교회의 면죄부로 오인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서신의 후반부에서 언제나 믿음에 따른 실천적 권고를 명령법 형식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바울은 구원 받은 우리가 앞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강조한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지 죽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만으로 부족하여 인간의 행함이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믿음의 진정성과 성숙성은 일상 속에서 그 열매인 행함으로 빚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질타하면서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을 가르친 사도가 있다. 그는 야고보다. 온전한 믿음이란 행함으로 드러나야 함을 설파한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이 구절은 바울의 ‘이신칭의’를 자칫 오해하여 행함을 유실하거나 윤리를 실종한 거짓 믿음으로 흐를 수 있는 폐단을 일찌감치 차단한다. 야고보의 신학은 믿음을 기치로 내세운 바울의 신학과 균형을 이루어 온전한 신앙으로 나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준다.
야고보가 말한 믿음이란 행함을 포함하는 신실함이다. 그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3-24)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 즉 행함에 근거한다는 야고보의 주장과 바울이 주장한 믿음을 통한 득의(得義)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울이 강조한 믿음이 온전한 신뢰라고 한다면, 야고보는 그러한 신뢰가 필히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믿음이란 정적 개념이나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액션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이행하려고 기꺼이 무모하다할 수 있는 모험에 오르기도 한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기 위해 고투하는 과정이다. 신앙생활에 방점(傍點)은 있을지언정 종점은 없다. 성서를 기준 삼아 자기 생애를 조율하려 하기 보다는 자기 생각과 욕망을 기준 삼아 성서의 메시지를 재단하고 해석하고 있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이단적 행태다. 우리는 앞의 해석 방식을 엑스지시스(exegesis), 즉 ‘석의(釋義)’라 하고, 뒤의 것을 아이스지시스(eisegesis), ‘자기해석’이라 한다. 성서가 본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들으려 하기 보다는 자기의 생각과 욕망을 성서 본문에 투사하는 아이스지시스 방식으로 성서를 읽으려 할 때, 성서는 더 이상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럴 경우 그의 생각을 단지 추인해 주는 잡서처럼 대하는 것이다.
바울이 가르친 ‘이신칭의’는 개신교회의 면죄부가 아니다. 참된 믿음은 삶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번역하지 않는 것은 죽은 믿음이다. 산상수훈의 결론부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귓가에 쟁쟁하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참된 지혜자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기대어 행하는 자란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삶을 조율하고 번역해 나가라!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의 행보를 걷는 사람이 취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신칭의, 개신교회의 면죄부인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칼럼- 이상명 목사 (미주장신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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