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군무부(無君無父: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다)의 종교로 낙인찍혀 온갖 수난을 겪은 천주교회와는 달리 처음부터 위군위민(爲君爲民)의 종교로 인식된 개신교는 일찍부터 애국심을 길러 왔다. 그런 기독교인의 애국심 발로의 한 표현은 초기 교회 때부터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스피어(R.E.Speer)는 1895년 한국을 둘러본 후 다음 같은 보고서로 한국 교인의 애국심에 대해 피력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흥미 있고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의 애국심이다. 우리가 탄 볼품없는 연안선(沿岸船)은 어느 주일날 한국의 북부[의 어느 곳]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대동강 변을 따라서 널려 있는 동네에, 대나무 끝에 작은 한국 깃발[태극기]이 매달려 휘날리는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이 깃발은 그 곳이 기독교인들의 주택이거나 혹은 교회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들 간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행위이며 주일에 그들의 주택이나 교회에서 애국적 표현을 한 행위였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 날의 성격을 선포하며, 또한 그 날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 것이었다.”
태극기를 거는 행위는 당시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때 일반 대중들은 태극기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때였다. 그러므로 태극기를 거는 자체가 무척 희귀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지시도 없이 자연스럽게 주일에 태극기를 자기들 집에, 그리고 교회에 게양하는 것으로 애국의 마음을 표현했다. 교회 행사가 있을 때 꼭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일반화된 모습임을, 초기 교회 행사 때 찍어 놓은 사진들을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한국 교회 애국의 일면을 보여 준다.
국가가 위기에 부딪혔을 때 교회는 기도회를 갖는 것으로 국가를 염려하고 위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1905년 일제가 한국을 강압으로 치 눌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함으로써 민족은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이런 어려운 때, 교회는 기도로 구원의 손길을 하나님께 청했다. 그 해, 9월 장로회 공의회에서 길선주 장로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갖자는 발의를 했다. 공의회는 이를 받아들여 전국 교회가 일주일을 국가를 위한 기도주간으로 선포하고 이를 실천했다. 같은 해 11월 을사늑약이 선포되자, 상동 감리교회에서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의 인도로 매일 수백, 수천의 교인들이 모여 국가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다.
1907년 7월, 정미조약(丁未條約)이 공포되어, 조선의 군대와 경찰이 해산되고,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 조선을 위한 기도를 세계 교회에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세계 교회가 조선을 위해 기도하여 범세계적 유대를 강화했다. 한국 교회는 기도로 국가를 위한 힘을 비축했고, 기도회를 가짐으로 항일의 모습을 구체화했다. 이에 일제는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인들을 항일의식을 선도하는 불순분자로 분류하고, 교회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내부(內部)에서 십삼도에 훈령하되 기도하러 간 사람이 있거든 거주, 성명을 자세히 탐지하여 속히 보(報)하라.”고 훈령했다. 기도하러 가는 사람은 항일분자로 낙인찍혀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항일을 단순한 기도회 개최 정도로 끝내지 않고, 집단적 시위 형식, 또는 폭력적 방법으로 표출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무장투쟁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볼 때, 잘못된 것이라는 논쟁 가능성은 여기서 배제하고, 이들의 행적을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공포되자, 격분한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한 항쟁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엡윗청년회(감리교 청년회)가 서울에서 모였는데, 이 모임의 명분은 교회 사업을 의논하는 것이었으나 실은 애국운동이 목적이었다. 이 때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이준(李儁)), 이동녕(李東寧), 옥관빈(玉觀彬), 김구(金九) 등이 각지 대표로 모였다. 이 회의에서 ‘도끼를 메고 상소’하기로 하고, 1회, 2회로 4∼5명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잡혀 갇히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자는 결의를 했다.
이준이 지은 제1회 상소문을 올리러 떠나기 전, 일행은 정순만의 인도로 상동교회에 모여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으로 수행하자는 맹약의 기도를 드리고 일제히 대한문(大漢門)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이들이 대한문에 당도했을 때, 일제 경찰이 나타나 강제 해산을 해 버렸다. 이 날에 민영환(閔泳煥)이 의로운 자결을 했고,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이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한편, 우선 을사 5적(五賊) 처단을 목적으로 전덕기 등이 평안도 장사들을 모집해 암살을 계획한 일이 있었다. 이즈음, 평양 교인 몇이 상경해 을사늑약 철폐와 5적 처단을 요구하는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일부 다른 교인은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글”을 살포하다 일본 경찰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다. 경기도 양주 지방 홍태순(洪太順)은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것에 격분하여 대한문 앞에서 자결했고, 교육자 정재홍(鄭在洪)은 이등박문(伊藤博文)를 암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시 자결했다.
이런 항일운동은 국내에서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진행됐다. 그 중 대표적 사건은 장인환(張仁換)과 전명운(田明雲)의 스티븐슨(D.W.Stevenson) 격살이다. 1908년 3월 21일, 당시 일제 통감부 외교 고문으로 있으면서 일제의 한국 강점을 여러 모로 도운,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슨을 장인환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권총으로 격살했다. 스티븐슨은 휴가차 귀국하여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서, “한국 황실과 정부는 부패하였고, 한국인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재미 한인단체들은 이의 취소를 요구했으나, 스티븐슨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격분한 장인환이 그를 쏘아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은 세계적 뉴스가 됐고 장인환의 재판도 여론의 초점이 됐다. 결국 장인환은 금고 25년 형을 언도받았고, 후에 감형되어 1924년 석방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의 애국단체들이 통합해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영향력 있는 단체가 됐다.
1909년 12월 23일,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 습격 사건이 있다. 그 날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이완용을, 군밤 장사로 가장한 이재명이 성당 앞길에서 품고 있던 칼로 그의 어깨와 허리를 세 번 찔렀으나, 호위 순사와 인력거군의 저지로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재명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평양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하고, 하와이에서 수학하다 1907년 귀국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중 국내의 매국노들 처단을 결심했다. 1909년 6월 평양 태극서점에서 안창호(安昌浩), 이동휘(李東煇), 안태국(安泰國) 등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재명이 거사 담당자로 택정됐고, 이에 따라 그가 이 일을 감행했다. 이재명 의사는 1910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될 때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태평하고나’ 찬송을 마지막까지 부르며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