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한 후 가만히 보니 개(Dog)를 키우는 집들이 많았다. 저 건너편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하도 짖어서 미웠지만 바로 앞집의 개는 달랐다. 앞집 개는 보통 개 보다 몸집이 너무 컸다. 가끔 밖으로 나오는 그 개는 아무 소리 없이 집 앞 나무에 묶여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어디가 아픈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개는 6 살 이었는데 원래 그런 개였다. 개 주인이 밖으로 나왔을 때 그 개에 대하여 물었다. Mastiff(마스티프)라는 종인데 원래 영국 개였다고 한다. 생김새는 얼굴이 늘어질 때로 늘어져 가만히 있어도 인상이 몹시 고약해 보였고, 덩치는 앞발을 들고 일어서면 나의 키와 비슷하든지 아니면 더 클 것 같았다. 몸무게는 적어도 80 파운드는 나가는 것 같았다. 이 개는 5명 식구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한번 뛰어다니면 온 집안을 아수라장을 만들 법한 개였다.
그런데 그 개는 이상하게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뛰지도 않았다. 의욕도 없어 보였다. 그저 땅에 주저앉아 하루 종일 이라도 있을 수 있는 개였다. 주인의 말을 빌리면 그 개는 한동안 고약한 인상 때문에 영국 왕실에 개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보니 너무나 움직임이 없고, 부지런하지 않아서 결국에는 짧은 기간 후에 영국 왕실의 영광스런 개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럴 법한 개였다.
그래서 그 개는 하루 일과가 엎드려서 있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공을 던지면 3-4번 뛴 후에는 흥미를 잃고 그 자리에 앉는다고 한다. 또한 너무 많이 걸으면 몸무게 때문에 다리 관절의 문제가 생겨 자신도 걷기 싫어한다고 한다. 앞집의 그 개는 집 안에서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개가 이럴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웃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시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개를 보면서 사람과 같이 생활하는 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개의 생활이 아니었다. 개는 크게 짖고, 뛰고, 먹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개가 사람 생활에 잘 적응하여 산다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신기한 일인지 모르지만 개로서는 너무나 불행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성도다운 성도, 하나님 자녀다운 삶, 전도자다운 생활을 사도바울의 편지를 통하여 깨닫게 하신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전한 편지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고린도전서 9장 16절) 라고하며 고난 가운데 사는 것도 “부득불” 즉 당연한 일이라는 말이다. 자신은 당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또한 고난이 있어도 그렇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다. 그 말은 바울이 영적으로 충만하고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는 잘 적응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영적으로 뛰지 못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덩치 큰 개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이 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성도로서 당연히 살아야 할 그 모습으로 살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때에는 어려운 일도 생길 수 있다. 어떤 때는 괴로움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님을 따라 달려가며 믿음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죽은 듯 한 삶을 살지 말고, 죽을 듯 한 어려움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히 이길 수 있음을 믿는 삶을 말한다. 걷고, 뛰고, 엎드리고, 크게 소리치며, 말하고, 행함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앞집에 덩치 큰 개보다는 하도 짖어서 목소리가 허스키가 된 몇 집 건너 그 개가 더 건강한 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늘 건강하게 움직이는 소망의 성도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