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오라”(마 4:19). 이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면서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입니다.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사도 바울의 이 외침은 교회 지도자로서의 영적 자신감과 권위를 드러내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우리도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지도자란 교회를 위하여 누구보다도 고통을 많이 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성도들의 행진이란 고난을 자처하는 “바보들의 행진”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보장받고, 가난과 핍박을 친구처럼 가까이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시대가 지나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인정받게 되면서, 교회에 유혹거리가 들어왔습니다. 목회자가 정의로움을 상실하고 교권을 남용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입니다. 대교회가 생겨나면서 후임자를 결정하는데 혈연의 영향력, 즉 족벌주의(nepotism)가 발생한 것입니다.
서기 341년 안디옥 공회의에서는 목사, 장로와 집사의 사역윤리에 대한 25개의 교회규정을 제정했습니다. 그 중 23번 규정은 한 지역을 영적으로 관리하는 감독의 후임자는 자기 동생이나 아들이나 다른 친척을 임명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배제하는 금령입니다. 그러한 구체적 방법으로 후임자 결정은 그 감독이 죽고 난 후에 지역의 주교들이 모여서 결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혈연의 침투를 배제한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는 대를 이은 가족의 헌신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우리 교회가 가진 장점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헌신이 기득권이 되지 않도록 조심을 한 것이 또한 초대교회의 전통이었습니다. 족벌주의라는 영어의 ‘네포티즘’(nepotism)은 조카라는 의미의 라틴어 ‘네포테’(nepote)에서 나왔습니다. 나중에 로마의 감독들이 자식이 없으니까 조카에게 교회를 물려준 것입니다. 족벌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지요.
교회는 사적 기관이 아니라 공적인 기관입니다. 교회를 공동체(community)요 공영체(commonwealth)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성도의 영적 공동자산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족벌주의를 배격하려고 4세기부터 조심을 한 것입니다. 나나 내 가족의 유익이 아니라, 성도 전체의 유익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공적 의로움을 추구한 것입니다.
교회의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앙의 선진들이 기울인 노력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도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