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기게 한국의 강점을 획책하던 일제는 1904년 8월 드디어 제1차 한일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한국 정부는 일제의 추천을 받은 일본인 재정고문과 외국인 외교고문을 채용하고 주요 정책을 협의를 한다는 것이다. 이듬해 이등박문(伊藤博文)은 강압적으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함으로써 한국의 식민화 야욕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이런 일제의 노골적 한국 침탈 야욕이 구체화되자 이에 대한 저항 또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항일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가 있었던가?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자기 나라가 외국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고, 동족이 수탈당하는 것을 보면, 매국노가 아닌 다음에야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같은 의분이라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간에는 의분의 근거와 투쟁 방법에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비기독교인들은 단순히 나라를 빼앗긴 의분과 원통함 때문에, 즉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자연적 애국심에서 투쟁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독립 쟁취를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불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나라 사랑은 이들과 달랐고, 그 투쟁 방법도 달랐다. 즉 단순한 애국심의 발로가 아닌, 보다 깊은 기독교 신앙에서 연원하는 의분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것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에 근거한 공분(公憤)이다. 약자 즉 지극히 작은 자를 도와주고 고난당한 자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해, 일제가 한국에서 저지르고 있는 악에 대한 저항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투쟁 방법도 복음적 방법, 즉 예수께서 보여 주신 비폭력, 무저항으로 항일의 정신을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의 비폭력, 무저항 정신의 한 예로, 1907년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해에 헤이그(Hague)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이준 열사 등을 밀사로 파송한 일 때문에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에 항거하는 운동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이 운동은 의병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의병운동은 을미사변(乙未事變:명성왕후 시해 사건) 직후 충청도 보은에서 비롯됐고,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단발령이 반포되면서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민간인들이 주축이 된 항일 게릴라 운동으로 사방에서 봇물 터지듯 일어나 일본군 진지를 습격하고 일본인들에 대한 테러 감행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이 의병운동은 항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교회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 특히 영·호남 지방에서는 의병들이 교회를 습격하고 교인들을 박해하여 한동안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피난 가는 데까지 이르렀다. 평양 지방에서도 이 의병운동이 파죽지세로 일어나다가 급속히 자제됐는데, 그 이유를 1908년 장로교 선교회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혜로운 교회 지도자인 길[선주] 장로가 그 일의 희망 없음을 간파하고, 백성들에게 도망가지도 말고 저항하지도 말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북쪽에서 이 혼란을 자제시킬 수 있었고, 한국을 온통 피투성이가 될 운명에서 구출할 수 있었다.”
길선주 장로의 이 같은 행위, 즉 의병들의 무장폭동을 자제하라고 하는 충고가 어떤 견지에서 보면 비애국적이고, 일어나는 민중들의 항일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길선주는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일제에 유린된 마당에 힘도, 무기도 없는 백성들이 농기구만을 가지고 막강한 무기로 중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오직 무죄한 백성들 피 흘리는 일만을 되풀이 할 뿐, 아무 소득이 없음을 간파했다. 차라리 무력 항쟁보다 힘이 없어 나라 잃음을 자성하며, 교육과 산업 증진을 통해 힘을 비축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길을 택하도록 권유했다.
백범 김구도 을사늑약이 선포되자 진남포 엡윗청년회 총무로 서울에서 모이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을사강제조약 철회를 위해, 도끼를 메고 대한문에 가서 상소했다. 그러나 그는 상소하러 간 동지들이 일제 헌병 일개 부대 출동으로 즉시 해산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이런 행위는 아무 효험이 없다 판단하고 동지들과 방침을 바꿔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 사업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는 황해도로 내려와 처음에는 문화 초리면의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으로 일하다 후에 안악으로 옮겨 그 곳 양산학교(陽山學校) 교원이 되었다. 그는 후에 해서교육총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
당시 한국의 상황으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항일의 방법으로 무저항, 비폭력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의 정신이요, 러시아의 톨스토이나, 인도의 간디, 근대의 미국 흑인 민권운동가 킹 목사가 지향했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1910년 북장로교회 선교사 블레어(W. Blair)는 “만일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항일을 선언했다면, 한국 교회는 또 다른 로마 가톨릭이 되었을 것이다”라 단언했다.
한국 교회의 항일투쟁은 이렇게 그 가닥을 잡아 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론이 그렇다는 것이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 것은 물론 아니다. 따라서 반세기 가까운 일제 치하에서 교회가 경과한 투쟁의 역사는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오늘에 있어 ‘바람직한 일이냐’는 재평가 돼야겠지만, 교회의 항일투쟁 역사는 엄연한 사실이므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 빼 놓을 수 없는 역사의 단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