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성령의 사실들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카고대학의 노만 페린(Norman Perrin) 교수는 누가복음을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사역,” 사도행전을 “교회를 통한 성령의 사역”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에는 항상 성령님이 사역에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실제로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성령이란 단어가 70회나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을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위하여 구약부터 성령을 약속하셨고 신약에 이르러 성령강림의 역사를 완성하셨을까?
사도행전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성령님이 오신 사건은 우리의 삶에 결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의 역사는 성령님의 오심으로 시작하였고,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진행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잘 살펴보면 성령강림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더욱 명확하게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전파와 기독교 부흥의 사명을 위해 성령님을 우리에 보내주셨다는 사실로 해석해 볼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것 같아 보인다. 성도가 주체적으로 세계복음화와 교회 부흥을 위해 힘쓰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성령의 임재를 예언, 통역, 병 고침과 같은 기적과 이사 등의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성령님은 그저 명분으로만 존재하면 되고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 교회와 선교를 이끌어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사도행전을 돌아가 보자. 그 핵심적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도들이 주도권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뒤에서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교회와 선교의 힘이었고 복음의 흥왕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비록 수도 적고, 건물이나 조직이 형편없어 보였지만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목말라 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구원받는 자가 3,000명에 이르는 부흥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교회는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도 이성과 현실에 기준을 더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신 목적은 성령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을 잊지 않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