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실패에 따르는 두려움 때문에 발생하는 수동적 자세 (passivity 내지 inactivity)를 다뤄보겠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두려움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현실로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두려워하면 할수록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뜻이죠.
라이트 형제에 대해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1903년 12월 17일, ‘키티혹크’란 비행기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비행에 성공한 윌버와 올빌 라이트 형제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과학자나 유명한 발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항공에 관해 가장 선도적인 발명가는 사무엘 랭리라는 수학 및 천문학 교수였습니다. 랭리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총책임자로 지내기도 했기에 매우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같은 해 10월과 또 12월 초, 랭리도 많은 사람 앞에서 두 차례 비행 실험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언론은 5만 불이란 거금을 사용했지만 실패한 랭리를 가차없이 비난했고, 랭리는 결국 항공에 관련된 모든 실험을 접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린 뒤 불과 며칠 후에 라이트 형제가 키티호크를 성공적으로 날게 했습니다.
랭리와 라이트 형제의 차이는 뭘까요? 랭리는 포기했지만, 라이트 형제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라이트 형제도 수십 번, 수백 번 실패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 앞에 포기하지만 어떤 사람은 실패를 발판으로 삼아 계속 도전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랭리같이 받아들입니다. 즉, 실패가 트라우마로 연결되고, 결국 꿈을 접게 하며, 그래서 성공하지 못하고, 현상유지에 연연하거나, 심한 경우 후퇴하고 위축된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 것이 성경적인가요?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패하고 낙심하고 자아연민에 빠져 무력히, 그저 대충 살라고 오셨습니까?
물론 믿는 사람도 고통을 받으며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매우 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린 모두 실패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 떨 수 있습니다.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계속, 평생 눌려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저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실패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학생을 종종 접합니다. 사실, 교육이란 것 자체가 반복을 통해 그릇된 접근 방법 및 해결방법을 수정하고 올바른 생각과 방식을 통해 문제를 풀어 정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학생들은 거의 매일 학교에서 새로운 내용, 익숙하지 않은 문제를 접합니다. 이런 과정을 어려서부터 제대로 인식하고, 실패를 거부하기보다 실수와 실패를 통해 실력을 쌓아가는 과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생은 새로운 과제나 문제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게으름을 피우거나 남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거나 부모의 기대를 위해서만 공부하면 학생은 실패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면 아예 피하려고만 합니다. 이게 쌓이고 쌓이면 수동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실패를 너무 심각하게, 감정적으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점이며, 또 실패했다는 이유로 “나는 실패자”란 딱지를 붙이고 살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그들을 위해 어른인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