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베랴 해변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제자들은 밤새 허탕만 치던 중 예수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포획을 경험한다. 이 일을 통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먼저 주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이를 일러준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주님을 만나고자 삽시간에 겉옷을 두른 후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뭍으로 올라가 보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조반을 미리 차려 놓으셨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거듭 대면하면서 제자들의 마음에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자리잡는다. 주님은 우리가 의심 많은 존재임을 아신다. 그래서 거듭 우리를 설득하시고 만나주시고 격려해 주신다. 요한의 보고에 따르면, 부활 예수는 제자들을 세 번 찾아와 주셨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처음 찾아주셨을 때는(요20:19-23 참조) 자신들 눈앞에 서 있는 존재가 과연 부활하신 예수님인지 혹은 그 존재가 단순히 천사나 영이 아닌지 조금 의심했을 수도 있겠지만, 주님의 거듭된 방문을 통해 스승의 부활을 분명 확신하게 된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근데 누구시죠?”라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는다. “제가 볼 때는 예수님 같으신데 정말 부활하신 것 맞으시나요? 혹시 예수님의 영이나 천사는 아닌가요?”라고 물으며 확인작업을 벌이지도 않는다(눅24:37 참조). 제자들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그들과 함께 계신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확실히 깨달았다.
“제자들이 주신 줄(호 퀴리오스 에스틴)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21:12)”
요한복음 21:12에서 “주신 줄”이라고 하는 부분은 헬라어로 ‘호 퀴리오스 에스틴’이다. 그런데 이 헬라어 표현은 사실 21장 앞부분에서 이미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21장 7절에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시라”라고 말할 때, “주시라” 역시 헬라어로 ‘호 퀴리오스 에스틴’이다. 또한, 같은 절에서 베드로가 “주라” 하는 요한의 말을 들었다고 묘사할 때, 거기 “주라”는 표현 역시 헬라어로 ‘호 퀴리오스 에스틴’이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호 퀴리오스 에스틴)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호 퀴리오스 에스틴) 하는 말을 듣고(21:7)”
이처럼 저자 요한은 21:7과 21:12에서 “주시라(호 퀴리오스 에스틴)”을 세 차례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디베랴 바다에서 밤샘 노동을 하는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셔서 포획의 기적을 선사하시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적 식사를 베풀어 주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21:1-14의 짧은 구절에서 “주님이시다(호 퀴리오스 에스틴)!”는 선언을 거듭 반복함으로써 저자 요한은 예수 부활의 확실성을 강력히 선포한다.
21장 7절과 12절에 거듭 등장하는 “주시라(호 퀴리오스 에스틴)”와 구조적으로 동일한 표현이 사실 앞에서 한 차례 사용되었는데, 21장 4절의 “예수신 줄”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헬라어로는 ‘이에이수스 에스틴’이다. 이 헬라어 표현 ‘이에이수스 에스틴’과 앞서 여러 번 언급된 ‘호 퀴리오스 에스틴’ 사이에는 단 한 가지 차이가 존재하는데, 바로 4절에서는 ‘호 퀴리오스’(주[the Lord]) 대신 고유명사 ‘이에이수스’(예수[Jesus])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제자들이 예수신 줄(이에이수스 에스틴) 알지 못하는지라(21:4)”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호 퀴리오스 에스틴)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호 퀴리오스 에스틴) 하는 말을 듣고(21:7)”
“제자들이 주신 줄(호 퀴리오스 에스틴) 아는 고로(21:12)”
그러니까, 저자 요한은 “예수”와 “주”를 서로 상호교환 가능한 단어로 사용한다! 이를 통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갈릴리 랍비 예수와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이 서로 같은 분이심을 확인해 준다.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직접 가르쳐 주시고, 그들 눈앞에서 표적을 행하셨으며, 그들과 함께 묵으셨던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한 분임을 증거한다.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의 땅을 밟고 걸으시던 그 예수가 바로 의심 많던 도마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부활의 메시야다(요20:28). 디베랴 바닷가에서 물고기 다섯과 떡 두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그 예수님이 바로 지금 다시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아침 식사를 베푸신 영광의 주님이시다. 로마의 사형틀에서 돌아가셨던 선생님이 바로 다시 살아나사 제자들을 거듭 만나주시는 영광의 주시다.
‘호 퀴리오스 에스틴’(주시다)은 요한이 전하는 부활의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요한복음 1-19장은 그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최면적 명상의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 다시 살아나셨다! 다시 사셔서 낙심한 제자들을 다시 그리고 또다시 찾아와 주셨다(요20:19-23; 20:24-29; 21:1-14).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신다. 부활하신 후 두려워하는 제자들과 함께해 주셨던 주님은 쉽사리 두려움에 빠지는 우리와 같이해 주신다.
‘호 퀴리오스 에스틴’은 요한의 고백일 뿐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다. “주님이시다!”라는 외침은 요한의 기쁜 소식일 뿐 아니라, 우리의 기쁜 소식이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호 퀴리오스 에스틴)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호 퀴리오스 에스틴)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21:7)”
호 퀴리오스 에스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