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가장 무서운 병 중 하나는 나병이다. 지금은 의학이 발전되어 좋은 나병 치료약이 많이 나왔고,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옛날에는 나병원이 따로 있어 일반 환자와 격리해 별도로 치료하고, 돌보았으나 요즘은 일반 피부과 병동에 입원 시켜 진료하고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나병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나병을 당시에는 문둥병이라 했고, 나병환자를 문둥이라며 차별하며, 무서워했다. 국가가 이들을 치료하고 보살필 여유가 없어, 이들은 스스로의 생존 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므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을 해 생명을 유지했다.
나병은 천형의 병으로 일컬어져 일단 감염되면 가족과 이웃과 동네에서 완전히 버림받는 무서운 병이었다. 살던 집과 동네를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하는 이들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 그대로였다.
이렇게 불쌍한 나병환자들을 눈여겨보고, 이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고쳐주기 위한 사역을 시작한 선교부는 미국 북장로교회였다. 1904년 선교부는 어빈(C. H. Irvin, 魚乙彬)과 빈턴(C. C. Vinton, 賓頓), 그리고 스미스(W. E. Smith, 沈翊舜) 세 의사로 하여금 나병 진료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케 하고 구체적 플랜을 세우게 했다. 1907년 인도 나병퇴치 선교부가 한국에 나병환자 치료를 위한 계획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 돈 400파운드를 보내 주어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1909년 부산에 처음으로 나병환자 수용소가 세워졌는데 이듬해 20명의 환자가 각지에서 모여들어 수용됐고, 1911년에는 40명 이상 환자가 수용됐다. 1914년 각 선교부가 지역을 나누어 선교하자는 예양협정(Comity Plan)을 맺음에 따라 본디 미국 북장로교회 구역이던 부산 지방을 호주 장로교회가 맡게 됨에 따라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로 이양되면서 자연히 나병원 사업도 함께 이양됐다.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는 당시 80명이 넘는 나병환자가 수용된 병원을 인수해 의사며 목사인 매켄지(J. N. MacKenzie)에게 관리를 맡겼다.
한편,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도 이 일에 나섰다. 1909년 전남 목포에서 의료 사역을 하던 포사이드(W. H. Forsythe, 保衛廉)가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벨(Eugene Bell, 裵裕祉)이 급환에 고통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로 가게 됐다. 그가 광주로 가던 중 길가에 버려져 죽어 가는 한 여성 나병환자를 발견하였다. 그는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자기가 입었던 털외투를 벗어 입혀 주고 자기가 타고 가던 말에 태워” 광주 기독병원의 구석진 방에 입원 시켰다. 그러나 나병환자가 자기들이 입원한 병원에서 함께 치료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른 환자들이 격렬하게 항의를 했다. 병원은 어쩔 수 없이 근처 외딴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녀를 그곳으로 옮겨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선교부는 나병환자 치료를 위한 특별 사업을 계획했다. 광주 기독병원장 윌슨(R. M. Wilson, 禹一善, 禹越遜)은 나병환자 치료를 위해 특별히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교섭으로 영국 에딘버러(Edinburgh)시 나병협회에서 미화 2천 달러를 보내 주었다. 그는 이것을 기초로 나병원을 건축하고 나병치료를 위한 본격적 사역에 나섰다. 이후 나병원은 여러 선교부의 지속적 관심으로 경북 대구, 전남 순천(애양원) 등지에 세워져 천형의 병을 앓는 이들에게 육체의 병을 치유해 주었을 뿐 아니라 영혼의 병도 치유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실천에 진력하였다.
이렇게 각 선교부가 나병 치료에 적극적으로 나오자, 장로회 총회도 나병에 특별 관심을 표하고 총회적으로 나병퇴치를 위한 특별 헌금을 하기로 결정했다. 제12회 총회는 12월 첫 주일을 나병원을 위한 연보 주일로 지킬 것을 결의했다. 제14회 총회는 30년 후에 나병 완전 박멸을 목표로 근멸회(勤滅會)를 조직, 발기하였다.
나병환자를 위해 애쓴 한국 목사가 한 사람 있다. 그는 그의 호 오방(五放)으로 더 알려진 최흥종(崔興琮) 목사로 전남 광주에서 사역했다. 최 목사는 선교사 포사이드의 나병환자 사랑에 감격해 일생을 나병환자를 위해 살았다. 그는 나병환자 진료를 위해 당시 유지들인 윤치호, 김성수, 김병로, 안재홍, 이인, 백관수 씨를 찾아가 협조를 얻어 나병근절협의회를 만들었다. 당시 민족 3지, 동아, 조선, 조선중앙일보 등의 협조를 얻어 나병환자를 위한 모금운동을 적극 펼쳐 큰 호응을 얻었다. 모금 액수가 4만 원에 이르자 조선총독부는 이에 자극 받아 나환자근절협회로 이 기금을 인수하게 하여 소록도에 나병원을 설치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나병원을 위해 일본 왕실과 총독이 지원금을 보내 주었다는 사실이다. 1923년 왕실은 대구병원에 미화 220달러를, 조선총독은 3,500달러를 헌납했다. 그리고 1930∼1935년 사이에 왕태후가 매해 1,000달러를, 그리고 1932년에는 6,000달러를 은급으로 지원해 주었다. 온 민족을 수탈 대상으로 삼아 온갖 포악을 자행하던 일제가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병치료를 위해 지원금을 준 일은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 돈을 받아 병을 고쳐야 하는 우리 민족의 비애는 참으로 크고 애처로웠다.
천형의 병으로 여기고 가족조차 경원하던 가련한 나병환자를 거두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료해 주고 돌보아 준 초기 선교사들의 위대한 사역은 아무리 찬하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일찍이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도 많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기록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으로 보여준 초기 선교부와 선교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은 후세 그리스도인들의 당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