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하지 못했던 고난을 당하면 사람은 누구나 고민하게 됩니다. 낙심하기도 하고 절망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진지하게 사색하게 됩니다. 신앙인이라도 고난을 만나면 '혹시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벌 받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하나님의 형벌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고, 하나님이 자랑스럽게 칭찬했던 욥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반드시 사순절을 먼저 보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그 고난을 견디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이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고난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면 십자가의 그 끔찍한 고난을 겪으셔야 했던 예수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고통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사랑하는 인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걸까요? 미워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고난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주시는 고난이라면 무언가 깊은 뜻이 담겨있지 않을까요?
미국 역사에서 어려웠던 시기를 들라고 하면, 남북 전쟁과 세계 대전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하여 두 사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루즈벨트입니다. 링컨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젊었을 때 친구와 동업을 하다가 배반을 당해 빚을 졌는데, 그 빚을 갚느라 17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약혼자를 사고로 잃었습니다. 일리노이 주 의원 선거에서도 패배했습니다. 수 많은 실패와 고통의 경험들이 그를 위기에 처한 미국을 건져내게 할 수 있었습니다. 루즈벨트는 자유롭게 걸을 수 없었던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외부로부터 오는 시련에서 이겨내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뼈아픈 고난을 통과하면서 축적된 지혜들이 결국 위기에 처한 국가를 회복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천사보다 사랑하시지만 천사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고난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1)고난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내가 누구인가를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자각하면서 사람은 사람다워집니다. 사람은 기계도, 동물도, 천사도 아닙니다. 자아 발견과 정체성, 자기 확신을 얻는데 없어서는 안 될 선생님이 바로 고난입니다. 진실한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데 고난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주님, 주님의 판단이 옳은 줄을, 나는 압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고난을 주신 것도, 주님께서 진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시편119:75)
(2)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인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요 교만하고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마음을 겸손하게 바꾸어 주는 것은 고난입니다.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는 모습은 교만입니다. 고통을 충분히 겪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타인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어디에서나 자기가 왕으로 군림하려고 합니다. 고난은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위선을 걷어내게 만듭니다.
(3)세번째 이유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눈을 뜨게 해줍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그 마음을 알 때 우리도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비결은 사랑과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