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연초부터 부패한 사회, 범죄로 점철된 인생들, 그리고 그에 맞서는 고독한 주인공을 등장시킨 국산영화가 제법 출중한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다. <마스터>, <더 킹>, <조작된 도시>, <재심> 등은 국정농단 사태 발발로 악화된 민심을 대변하며 시류에 적절하게 편승하고 있다.
<프리즌>도 이들과 같은 물결을 타고 나름 순항중이다. 여기에 더해 영화 자체가 채택하고 있는 서사의 작법도 상업적 측면으로 볼 때 준수한 경쟁력을 갖춘 편이다. 참신함을 바랐던 관객들은 서운하게 느낄지 모르겠으나, 익숙함 안에서 편한 재미를 찾으려 한다면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이라는 핸디캡을 안고도 괜찮은 흥행성적을 거두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누아르적 화법: "기분 더럽냐? 사는 게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누아르(noir, 검은색)'라는 용어는 19-20세기 영미권 범죄-추리소설이 프랑스로 전파되며 유래된 말이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출판계를 대표하고 있는 갈리마르사(Gallimard)가 해외에서 수입한 범죄-추리소설을 세리 누아르(Série Noire: 어두운 이야기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이면서, 누아르라는 용어는 범죄극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194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필름 누아르(film noir)는 이 누아르 소설들을 영화화하면서 구축된 장르 혹은 스타일이었다. 지극히 냉정하고 무감각한 태도를 기반으로 현실세계를 폭력적으로 묘사하는 하드보일드(hardboiled) 범죄-추리소설, 그리고 유럽에서 건너온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만남이 필름 누아르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다.
▲미국 필름 누아르의 전성기를 연 기념비적 영화 <말타의 매>(The Maltese Falcon, 1941, 왼쪽)와 대작 누아르 <빅 슬립>(The Big Sleep, 1946). |
사실 양자의 결합은 오묘한 면이 있다. 표현주의란 1910-1920년대 독일에서 유행한 미술·영화사조로, 객관적 사실성을 거부한 채 작가 혹은 연출가가 느끼는 강렬한 감정들, 즉 공포, 증오, 불안, 사랑 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스타일이었다. 지극히 냉소적이고 무감정하며 현실적인 하드보일드 소설의 정서와, 극단적 감정들을 과감하게 날것 그대로 표출하는 표현주의의 연합. 얼핏 생각하기에 서로 전혀 어울릴 수 없을 듯 하지만, 의외로 이런 시도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40년대는 대공황의 여파와 함께 유럽에서 전파된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미국사회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었던 시기다. 마음의 양지(陽地)에서 슈퍼히어로 코믹스가 정의로운 내일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며 구원의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동안, 음지(陰地)에서는 필름 누아르가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오늘에 대한 냉소적 체념을 대리적으로 유형화시켜주고 있었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범죄와 기만이 가득하고 공권력조차 조직폭력에 복속된 현실에서, 주인공은 무한하게 고립된 채 생존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한다. 필름 누아르의 공통된 서사 구조이다.
<프리즌>은 필름 누아르의 보증된 공식들을 나름 적절하게 차용하고 있다. 러닝타임 내내 크게 변하지 않는 어두운 배경, 퇴색한 죄수복 같은 검푸른 색조, 웃음기 없는 뒤틀리고 피로한 얼굴들, 등장인물들 사이 실낱같이 남아있던 신뢰감마저 남김없이 녹여버리는 배신과 사기의 행태, 복수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결말 등은 모두 누아르적 문법을 따르고 있다. 주인공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치명적 매력을 가진 팜므파탈(femme fatale)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교도소 내 실권을 장악한 익호(한석규 분)가 수사를 위해 잠입한 형사 유건(김래원 분)을 휘하로 삼은 뒤 던진 대사는 <프리즌>이 표방하는 어두운 세계관을 함축적으로 내보인다. "기분 더럽냐? 사는 게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교도소를 자신의 왕국처럼 지배하는 익호(왼쪽에서 두 번째, 황색 죄수복). |
◈서열의 숙명: "족보도 없는 XX가 어디서 겁도 없이 (감)빵에서 대가리를 잡아?"
누아르의 서사는 무수한 작품들을 통해 반복 재생산돼 왔다. 더구나 우리는 미국이나 프랑스 누아르뿐 아니라, 주로 홍콩을 배경으로 삼는 동양적 누아르까지 섭렵한 바 있다. 이런 우리에게 <프리즌>의 누아르적 화법이 식상해 보이지 않으려면, 진한 감정이입을 허용케 할 만한 특별한 영화적 소재가 필요하다.
감정이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일상생활에서 몸으로 느끼는 실존적 고뇌를 마음에 스며들듯, 은근하면서도 아리게 각인시켜야 한다. <프리즌>은 한국사회 특유의 서열문화를 이 각인의 대상으로 선택했다.
<넘버 3(1997)>의 인기몰이 후 <친구(2001)>, <조폭마누라(2001)>를 거쳐 <가문의 영광(2002)>까지 소위 '조폭영화'들이 극장가를 점령하다시피 하던 때가 있었다. 이 당시도 한국사회 특유의 서열문화는 영화의 서사 전체를 이끄는 단골소재로 등장하곤 하였다. <프리즌>도 그 궤도에서 현저하게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소소한 이탈시도를 감행하면서 작품의 정체성을 차별되게 정립하려 한다.
익호는 조직폭력배 출신도 아니면서 오랜 시간 교도소 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권력을 휘어잡기 위해 폭력, 공포심, 용인술, 그리고 범죄로 획득한 부를 적재적소에 동원한다. 죄수들은 물론이고 간수와 교도소장마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돈과 폭력의 힘에 굴종한다. 애초 현 교도소장(정인웅 분)부터가 말단 간수 시절부터 익호에 의해 키워진 인물이다.
익호의 권력을 구심점 삼아 교도소 내외의 범죄 전문가들이 한 팀을 이룬다. 이들은 소장의 묵인 하에 교도소 정문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강탈해도 뒤탈이 없을 부정한 재물과 마약 등을 훔치고 고액 청부살인을 실행한다. 익호의 범죄 행각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언론인이든 경찰이든 고위공직자든 조직폭력배든 상관없이 무참하게 살해된다.
이처럼 익호는 기존 조폭영화들이 의존하고 있던 '서열의 질서'를 부분적으로 전복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존 질서의 구성원들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는다.
교도소 내에서 익호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이들은 나름 조직폭력계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조폭두목 출신 수감자들이다. 익호를 기습해서 칼로 찌른 창길(신성록 분)이 대표적이다. 그는 익호의 출신성분을 도전의 명분으로 삼으며 익호에게 일갈한다. "족보도 없는 XX가 어디서 겁도 없이 (감)빵에서 대가리를 잡아?"
▲창길(왼쪽)과 홍표. 익호에게 도전하는 소위 '정통' 조폭 출신들. |
그렇다 해서 익호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출신성분 측면에서 정통 조폭이 아니고, 공권력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공권력을 장악해 버린다는 점에서, 기존 한국영화의 조폭들과 차별되기는 하지만 거기까지다. 속된 말로 '가오를 잡는 데' 목숨을 거는 것이나, 폭력을 동원해 도전하는 경쟁자나 배신자를 잔혹하게 지워버리는 모습에서는 기존 한국 조폭영화의 악당들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핵심인물의 상투적 전형성으로의 회귀, 이것이 영화의 결말을 권선징악형 누아르의 클리셰(cliché)로 유도한 원인일 것이다. 이는 익호라는 배역에 부여된 참신해 보이는 설정에 기대를 준 관객들을 실망시킨다. <프리즌>의 결말이 생동감을 잃은 데는 흥행을 의식한 연출가의 의무감과 압박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관객에게 정의의 승리라는 대리만족을 선사해야 했을테니 말이다.
◈타락의 연쇄: "어떤 놈들을 상대하건 수뇌부터 무너뜨려야 하거든"
온갖 미제사건의 정황적 단서들이 익호가 장악한 교도소를 향하고 있음에도, 물증의 결여에 부담을 느낀 경찰 상부는 수사신청을 기각한다. 이 미제사건들 가운데는 열혈기자였던 유건의 형에 대한 의문사도 포함되어 있다. 형사 유건이 죄수의 탈을 쓰고 익호의 세상에 잠입한 이유이다.
결국 범죄의 전모는 유건의 활약으로 밝혀지고, 익호는 뒤늦게나마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공권력에 의해 처리된다. 덤으로 유건은 처절한 격투를 통해 형의 복수를 성취한다.
▲교도소에 잠입한 형사 유건. 정체를 숨기려 날건달의 모습을 연기한다. |
순수 영화평론의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스럽게 느껴지는 식상한 결말일 수 있지만, 기독교 신앙의 눈으로 보면 나름 유의미한 질문이 던져진다. 선한 역의 기적적인 승리를 보고 길어내는 물음은 아니다. 그보다 유건이 익호의 권력기반을 해체하기 위해 동원한 수단에서 흥미로운 논제가 발견된다.
유건은 형의 죽음, 다수의 절도 및 살인사건의 배후가 익호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익호의 최측근이 되려 한다. 익호의 부탁으로 배신자를 찾아내 데려오고, 조폭 출신 죄수들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익호를 구해준다. 심지어 익호가 배신자의 처리를 맡기자 공작기계로 사람의 팔을 잘라내기도 한다.
종국적으로 유건은 복수와 사건 해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내지만, 그 대가로 경찰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한다. 익호로부터 옮겨진 타락의 씨앗들이 유건에게 이식된다. 이것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의도된 미장센(Mise-en-Scène)일 것이다.
유건은 누구도 손대지 못한 굵직한 사건을 해결한 경찰의 영웅이 되지만, 교도소 잠입 후 저지른 범죄행위들로 인해 죄수 신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가 황색 죄수복을 입고 교도소를 배회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모범수를 표시하는 이 황색 죄수복은 작중에서 오직 익호에게만 허락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유건의 마지막 대사가 나온다. "어차피 거기도 사람 사는 데고, 시간은 똑같이 흐르니까요." 이 말은 영화 중반 익호가 유건에게 가르친 것이다. 유건은 이제 교도소 내 질서에 적응하는 것뿐 아니라 그 질서를 장악하는 일에도 별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영화 중반, 유건은 익호에게 묻는다. "근데 비결이 뭐요? 뭐든 맘대로 못하는게 없다면서." 익호의 대답이 걸작이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사는 비결? ... 어떤 놈들을 상대하건 그 수뇌부터 무너뜨려. 그게 제일 빨라."
▲유건(오른쪽)에게 상대편의 수뇌를 먼저 무너뜨리라고 가르치는 익호. 이 감시탑은 영화 종반 유건이 익호의 가르침을 실습하는 최종 레슨의 현장이 된다. |
영화 종반 교도소 감시탑의 대결에서 유건은 익호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습한다. 이때는 이미 유건과 익호의 원한관계가 완전하게 표면화된 상태이다. 유건은 익호의 범죄사실에 대한 물증을 확보한 뒤, 방화를 통해 교도소 전체를 극심한 혼돈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경찰이 대규모 수사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익호의 권력기반을 붕괴시킨 뒤, 유건은 고립된 익호와 일대일 격투를 벌인다.
익호는 무너져버린 자신의 세상을 바라보며 악에 받쳐 유건을 죽이려다, 경찰 스나이퍼들의 저격에 목숨을 잃는다. 이로써 유건은 익호라는 수뇌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남은 것은 유건이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는 일뿐이다. 유건은 자신의 멘토 익호가 남긴 최종 레슨에서, 익호를 살해하여 그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체화한다. 이로써 유건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정의를 희생시키는 이율배반적 딜레마를 기꺼이 수용한다.
이처럼 '타락의 상속'이라는 현실적 소재를 내건 덕에 유건이 모범수복을 입고 등장하는 영화 마지막 장면은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확고한 미장센을 수여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장면들의 경우, 화면 자체가 전달하는 암시적 이미지 대부분이 대사와 인물에 매몰된다. 서사의 속도감에 휘말려 각각의 장면이 자체적으로 창조하는 잉여적 효과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마지막 장면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그것이 암시적으로 부여하는 이미지가 상당한 현실적 환기력을 갖기 때문이다. 익호와 유건이 서로 확연하게 겹쳐 보이는 기시감 속에는 우리 삶의 현실이 진하게 투영되어 있다.
◈악의 도성: "당장 꺼져! 여기 내 구역이야! 내가 만든 내 세상이야, 이 XX들아!!"
히포의 주교이자 위대한 신학자였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만약 악당이 무뢰한들을 가입시킴으로써 큰 무리를 이루어 어떤 지역을 확보하고 거주지를 확정하고 도성들을 장악하고 민족들을 굴복시킬 지경이 된다면, 왕국이라는 이름을 아주 쉽게 획득하게 된다. 왜냐하면 탐욕을 없앰으로써가 아니라 아무 징벌을 받지 않음으로써, 왕국이라는 명칭에 명백히 실체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De Civitate Dei, 4, 4)".
<프리즌>에 등장하는 익호의 작은 왕국이 이와 같다. 이런 왕국은 폭력과 돈에 의해 지지되는 서열의 질서를 추종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세상의 본질적 지배원리다. 익호를 몰아낸 유건이라는 경찰 개인이 가진 정의감과 가족애는 결국 서열의 질서 상층부를 점유하는 데서 솟아나는 도취감에 의해 희석돼 버리고 만다.
▲자신의 원 정체성을 애써 억누르고 교도소의 지배원리에 적응해 가는 유건. |
원(源) 기독교 신앙은 세속적 지배질서의 전복이나 그 상층부의 점령을 열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 관여하면 할수록, 그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에 동일화될 수밖에 없는 사람 본연의 죄성과 나약함을 뼈저리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즌>은 이 비참한 운명으로부터 탈출할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영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본정신인 보편적 냉소주의에 기꺼이 동참할 뿐이다.
한국 사회의 헛된 서열의 질서는 지식, 돈, 폭력의 확보를 통해 지배력을 갖춘 인물들을 끊임없이 칭송하도록 우리를 세뇌한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상층부를 차지한 이들의 '가오잡기식' 허세를 모방하게 한다.
<프리즌>의 결말은 이런 실상에 대한 생생한 알레고리다. 마지막 감시탑 격투에서, 익호는 자신을 포위하고 총을 겨눈 무장경찰들에게 포효하듯 선언한다. "당장 꺼져, 이 XX들아! 여기 내 구역이야! 내가 만든 내 세상이야, 이 XX들아! 아무도 못 건드려!"
교도소 내 조폭들의 저열한 질서를 표현하는 이 영화의 무감정한 직설화법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조롱과 저항의 정신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사람 본연의 무력함에 대한 체념과 환멸의 정서를 대변한다.
▲익호의 욕망에 조금씩 물들어 가며 그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유건. 이로부터 탈출할 길은 그 누구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
<프리즌>에 대한 평론가들의 배점이 박한 것은, 상당히 진지한 누아르적 화법을 채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비장한 서사를 갖추지 못한 데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비극을 철저히 비극답게 연출하지 못하고, 그 끝을 정의의 승리라는 클리셰로 모호하게 중화시켜 놓은 것에 대한 실망감의 반영이다. 흥행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면, 평론가들이 바라던 극단적으로 참신한 연출이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신앙의 입장에서는 유의미한 교훈을 전해 준다. <프리즌>은 한국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부당한 서열의 질서와 허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폭로하며, 이것들이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갖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타인보다 잘나고, 돋보이고, 높은 지위를 획득하기 바라는 맹목적 욕망, 자기 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붙여 탐욕을 정당화하는 세태는 신앙의 정신에 정면 위배되는 것이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마 4:8)"의 본질이, 교도소 내의 저급한 마초적 폭력의 질서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계속>
▲박욱주 박사.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