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가 지난해 썼던 칼럼들을 모아 <생각을 생각한다(두란노)>라는 책을 펴냈다. 성경적 권위에 기초한 생각으로 신앙과 인생과 역사에 배어 있는 생각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권하기 위해 쓰인 이 책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갖게 된 고정관념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지난 3월 초, 서빙고에 위치한 온누리교회에서 이재훈 목사를 만나 책과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청취했다.

-책이 뻔하지 않고 통찰력을 많이 얻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닌 메시 크리스마스, 카르마와 카리스마, 바리새인과 에스라인, 전통과 정통 등의 비교는 신선했습니다. 바쁜 목회 가운데서 이런 통찰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요.

"책 이름을 <생각을 생각한다>로 붙인 것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도그마에 갇혀 버릴 위험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적 열정을 만들어내는 지식이 올바른 생각에서 나왔는가 돌아봐야 합니다.

정말 옳다고 믿어서 시간과 에너지, 삶을 다 쏟아붓는 열정이 있는데, 그 열정 이전에는 분명 어떤 생각이 있었지, 그 열정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열정의 기반이 되는 그 생각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는 무엇을 비판할 때 갖는 인식론의 문제입니다. 노란 안경을 쓰면 다 노랗게 보이지 않습니까? 문제는 안경이야 썼다가 벗을 수 있지만, 우리 내면에서 어떤 안경을 쓰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태어나면서부터 힌두권에서 자란 사람들은 늘 그런 세상만을 보게 되고, 불교나 유교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념이라는 안경을 쓰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보면 다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가 좌우로 치우치는 것은 생각이라는 프레임 때문입니다."

-책에서 그 '생각의 함정'에 대한 부분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옳음'의 기준이 없으면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준이 되는 생각 자체를 동시에 비판하지 못합니다. 서론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비판의 기준이 되는 그 생각을 동시에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생각이 얼마나 지엽적일 수 있는가 하는 부분에 있어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들도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쳐서 진리의 한 부분만을 붙잡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붙듭니다.

예를 들어 촛불을 들건 태극기를 들건, 일말의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든 것을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그런 부분들을 늘 되돌아보게 되는데, 신앙 안에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신앙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에 비춰 내 생각을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 생각의 한계' 안에서 보는 것이 자유주의라면, 복음주의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내 생각을 다시 반추해 보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하나님의 진짜 진리의 원리에 따라 우리의 생각을 점검하고, 사회와 신앙과 공동체 등 여러 영역들을 한 번씩 점검해 봤습니다. 문제에 대해 썼다기보다는 자기고백적인 내용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며, 뒤집어서 썼습니다. 그래서 조금 날카로운 느낌이 있습니다."

◈계시 앞에 '겸손한 이성' 필요

-말씀으로 신앙을 비추고 객관화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김영한 박사님(기독교학술원장)에게 배운 것이, 교리적으로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한 부분일 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는 자체가 교만이지요. 성령론도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어떤 부분에 있어 신비적이지요. 물론 신비주의는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법칙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법칙을 넘어선 신비적 영역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 자체가 신비(mystic) 아닙니까? 또 정반대로 지식적인 면도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해선 안 되지요. 그리고 내 경험만을 절대화해서도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부분일 뿐이라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런 겸손은 양비론으로도 흐를 수 있을텐데, '소신 없음'과는 어떻게 다른지요.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깔면 힘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을텐데요.

"그럴 수 있습니다. 옳다고 믿는 것을 버리라는 건 아닙니다. 옳다고 믿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과의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 '옳다'고 믿는 것은 분명히 있어야 하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또한 함께 있다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서론에서 '이성적 비판'보다 '올바른 계시'를 강조하셨는데, 계시에도 이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계시와 이성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계시의존사색'이라고 하는데, 이성의 출발은 계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가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을 판가름하는 기준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계시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이성의 산물로 봅니다.

계시란 초월적인 분이 유한한 존재에게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하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의 특성을 보자면, 신비로운 계시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형성 과정을 봐도 어느 한 사람이 편집회의를 통해 만든 것이 아닌데도, 성경을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편집한 것 자체를 계시로 인정하지 않지요. 그런 점에서 성경이 계시로서 주어진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계시로 주어진 책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우리 이성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성적 사고 없이는 계시가 이해되지 않지요. 그래서 이성이 중요하지만, 이성의 겸손, 겸손한 이성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시를 이성으로 해석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적 사고로 신학적 판단과 생각을 하지만, 이성은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을 생각한다>에서는 '겸손한 이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재훈
▲질문을 듣고 생각에 잠겨 있는 이재훈 목사. ⓒ김진영 기자

◈가장 큰 걸림돌, 잘못된 하나님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중에서 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가장 잘못된 선입견 또는 고정관념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하나님에 대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리라고 지레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고, J. B. 필립스라는 분이 쓴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 나오는데, 하나님이 마치 교통법규를 어긴 사람을 적발하기 위해 숨어있다 몰래 나타난 경찰관 쯤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것을 늘 지켜보고 있다가 벌 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주는 것에 너무 인색한 구두쇠 같은 할아버지 같은, 그런 여러 잘못된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경험을 투사해서, 하나님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하나님관(觀)이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책 내용 중 갈등을 통해 다툼과 분열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성숙한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는 방법으로 '서로에 대해 자유롭게 반대할 수 있는 관계(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기 中)'를 제안하셨습니다. 교회에서도 실천하고 계신지요.

"그것이 저희 교회 목회철학 중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책에도 나오지만 파커 팔머라는 분이 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보면, '민주주의의 마음을 치료'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사회 속에서는 각자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고, 찬성 반대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찬성과 반대가 많이 왜곡돼 있습니다. 예수님도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라(마 5:37)'고 하셨는데, 이를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것은 눈치를 보는 것이고, 다른 이유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아니오'인데 '예'라고 하고, '예'라고 해야 하는데 다른 이유 때문에 '아니오'라고 합니다.

세상 정치에서 당파와 계파 정치의 문제점도 바로 개인의 의견을 말살해 버리기 때문 아닙니까. 교회 안에서도 친밀한 사람들끼리 있으면 각자 의견을 소신껏 내세우지 못하고, 친한 사람이 주장하면 그냥 '예' 해 줍니다. 반대로 관계가 껄끄러운 사람이 주장하면 머리로는 '예'라도 입으로는 '아니오'라고 합니다. 이것이 교회 정치의 세상 정치화(化)입니다.

생각을 생각한다 이재훈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의 책 <생각을 생각한다(두란노)>.

그래서 저희 온누리교회는 리더십들과 회의할 때, 솔직하게 의견을 표현하도록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의 의견에 '아니오'라고 말했다 해서 절대로 불이익이 있거나 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단점이 있는데, 내 의견에 반대하면 '나를 무시했다, 내 인격을 모독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피니언(의견)'과 '캐릭터(성격)'은 다른 것입니다. 의견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의견이 다르다 해서 인격적인 관계를 단절해선 안 됩니다.

온누리교회를 이끌면서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내 의견과 다르다 해서 절대 적(敵)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보완해야 하는 측면입니다. '어떻게 반대 의견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가? 그래서야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지만, 좀 오래 걸리더라도 반대의견을 포용하고 귀를 기울이면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 교회 아닙니까. 전혀 다른 의견을 말하면서도, 좋은 관계일 수 있습니다.

정말 좋은 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지,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면서 그 속에 사랑이 없는 것도 진정한 진실이 아닙니다. 진정한 진실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파'와 '진리파'가 서로 싸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파'는 무조건 진실을 덮자고 하고, '진리파'는 사랑 없는 심판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가 함께 계신 분입니다. 교회의 교회 됨은 세상과 다른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친한 사람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할 수 있어야 하고, 가깝지 않다 해도 기꺼이 찬성하고 따라주는 관계가 되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세상과 달라야 하는 점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부분들이 시스템화돼 있는지요.

"저희 교회 안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투표로 결정하지 않고 합의합니다. 명문화된 규정은 없고 너무 대상 인원이 많을 때는 투표로 해야 하겠지만, 일상적 사무처리를 함께하는 당회 운영위원회 20명을 대상으로는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습니다. 몇 분이 반대하더라도, 대화를 계속 시도하면서 설득합니다. 때로는 그 일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합의를 통해서 하도록 룰을 만들었습니다.

2-3명만 반대할 경우, 물론 다수결로 통과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합의해야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 개인적인 룰이 있는데, 어떤 어젠다이든 이를 반대하는 분에게 동의·제청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동의·제청을 하지 못하면,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설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의가 마치면 의견이 대립했던 분들끼리 서로 안아주면서 둘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