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1-3절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요한복음 21장은 “그 후에”로 시작한다. 헬라어 메타 타우타는 문자적으로는 “그 일들 후에”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일들”은 어떤 일들을 가리키는가? 필시 바로 앞에 나오는 사건들, 그러니까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만나 주신 사건들을 지칭한다. 자신들도 스승처럼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셨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생생히 목도했다는 동료들의 증언을 묵살한 도마를 위해 다시 찾아오셨다. 그런 감격스럽고 충격적인 일들 후에 부활의 주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사건이 요한복음 21장에 담겨 있다.
저자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부활 후 딱 한 번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적어도 세 번 나타나셨다(요21:1 및 21:14 참조). 부활 후에도 거듭 제자들에게로 향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그분의 놀라운 은혜를 엿보게 된다. 한편, 방문마다 고유한 목적이 있음 또한 보게 된다. 첫 번째 방문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알리시기 위한 방문이었다면, 두 번째 방문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강력히 거부하는 제자 도마를 위한 방문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세 번째 방문은 15절 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한 방문이다. 주님께서 일하실 때는 이처럼 분명한 목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방문을 낭비하시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가 주님이 일하시는 목적을 늘 선명히 본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복음 21장의 기사는 일곱 명의 제자들을 소개한다(2절). 시몬 베드로를 필두로 요한복음 20장에서 부각되었던 도마 그리고 요한복음 1장에서 주목받았던 나다나엘,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즉, 야고보와 요한)과 다른 제자 둘이 언급된다. 공관복음에서 핵심 제자군이라면 역시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렇게 3인방이다. 변화산에 주님과 함께 올라갔던 것도 이들 아닌가?(막9:2 이하 및 병행구절) 그런데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들”을 언급하기에 앞서 도마와 나다나엘을 언급한다. 그러고 보면 요한복음에는 누가 더 핵심적인 제자인가에는 저자의 독특한 안목이 담겨 있는 듯하다. 어찌 보면 다른 동료 제자들을 먼저 언급하는 겸양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제자 중 누구의 이름이 먼저 혹은 자주 언급되는가보다 누구의 제자인가가 훨씬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요한복음 21장 2절에 나오는 “또 다른 제자 둘”이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21:2)”
개역개정에 요한복음 21장 2절에 나오는 “또 다른 제자 둘”(저자 요한은 이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이란 표현의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의 다른 제자 둘”이다. 2절에서 베드로로 시작해서 5명의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여기 “그의 다른 제자 둘”은 그 중 누구의 제자도 아니다. 이 두 명은 바로 예수의 제자다. 2절에 나오는 “그의”라는 대명사는 바로 앞에 등장하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대명사는 앞서 1절에 언급되었던 예수님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대명사가 어느 단어를 지칭하는지 확인할 때, 근접한 단어를 먼저 고려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일반적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앞에 나오는 세배대의 아들들, 그 앞에 나오는 나다나엘, 도마, 베드로 중 누구도 저자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두 사람의 스승이 아니다. 1절에 언급된 예수님이 이들의 스승이시다.
요한복음 21장 2절에서 대명사(“그의”)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위와 같은 관찰은 다시금 요한복음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켜 준다. 학자들은 요한복음 21장을 보통 에필로그로 분류한다. 요한복음 내러티브의 본체는 20장 마지막에 나오는 도마의 클라이맥스적 신앙고백과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에 대한 선언으로 마무리되고, 21장은 일종의 후기로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학자들의 견해가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위에서와 같이 2절에 등장하는 “그의”라는 대명사에 주목해 보면, 요한복음 1-20장에서와 마찬가지로 21장에서도 예수님이 여전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음이 입증된다. 요한의 이야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주인공이다. 우리의 이야기에서는 과연 누가 주인공인가?
머릿짓으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대변인 삼고, 스승을 보호하고자 “용맹하게”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베었던 시몬 베드로는 여전히 제자들 무리 가운데서 “리더십”을 발휘한다(요21:3; 13:24 및 18:10 참조). 베드로가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자 동료 제자들이 바로 따라나선다.
그런데 잠깐! 지금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부활하신 주님을 두 번 대면한 후 제자들이 보여주는 반응이라기에는 다소 어색하고 부적절해 보인다. 시몬 베드로에게 그리고 동료 제자들에게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는 듯한 암시를 받는다(요21:15-17참조).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의 모습이 그들의 영적 둔감함을 암시해 주는지도 모르겠다(요21:4참조).
어찌 되었든 베드로의 “리더십”은 이날 밤 일절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낮보다 고기가 잘 잡힌다는 밤 시간을 골라 철야 작업을 했다. 적어도 세 명의 전문 어부들(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을 포함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밤새 동원되었다. 하지만 헛수고다. 완전 허탕이다. 디베랴 호수의 모든 물고기는 작은놈 하나 예외 없이 이들의 그물을 철저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피해 간다(요21:6 참조). 크레이크 키너(Craig Keener)가 그의 두 권짜리 요한복음 주석에서 말한 대로, 저자 요한은 이 부분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그러나 요한복음은 바로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허무함과 탈진, 노동 무가치를 경험한 일곱 제자를 향해 다시 한번 은혜로 다가오신다(요21:4 이하 참조). 바닥을 치는 인생 경험이 때로는 축복의 짙은 그림자다. 만일 그런 경험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면 말이다. 만일 그런 체험으로 인해 우리 삶에 주님의 개입이 필요함을 실제로 인정하게 된다면 말이다. 바로 이날 밤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