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다소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특별히 이 지역은 헬라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상업이 번창했고, 지리적 교통이 발달한 곳이었다. 바울이 태어났던 다소라는 도시는 당시 세계문명의 주류였던 그레코-로만(Greece-Roman)문명이 꽃피운 전형적인 도시로서 동서양의 합류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에 철학, 교육, 문학, 법학, 의학 등 다방면의 학문 분야에서 탁월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다소는 큰 항구도시로 중요한 상업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 셈족 문화권과 헬라 문화권의 교차점으로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필적할만한 문화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그 당시 다소에는 로마인과 헬라인 그리고 원주민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으며, 인구는 약 50만 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그리고 가말리엘로부터 학문을 이어 받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엄격한 유대식 신앙교육을 받았다(행22:3). 뿐만 아니라 바울은 다소에서의 출생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레코-로만의 다양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교육은 다른 이에게 뒤질 것이 없어 보이는 완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예수님을 도메섹에서 만나기 전까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철저하게 핍박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목숨과 같이 지켜왔던 신앙과 유대교적 교육으로는 도저히 예수라는 인물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며 예수가 구원자라고 외치는 자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자신이 믿고 있던 신앙에 궤변론자 같았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바울은 이와 같았던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며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요 그리고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아온 자였다고 고백하게 된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은 다메섹에서 이뤄졌다. 그가 의기양양하여 살기를 띄우고 달려가고 있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싸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음전파자로의 삶을 살게 되었다.
바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그는 두 가지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첫째, 예전에는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 생각하여 정죄하고 핍박했었던 모습이 이젠 나 또한 주님 앞에 섰을 때 부족함이 많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자신이 율법에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 생각했지만 주님을 만나고 한없이 부족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둘째, 예전에는 유대인만을 강조했던 그의 생각이 헬라인도 로마인도 그리고 이방인도 모두가 복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그의 이러한 변화를 성경에서 표현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리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바울의 인생에 다문화사역의 시작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이 자랑해 왔던 명예, 칭송, 그리고 부귀영화 그리고 차별마저도 다 하나님 앞에 헛된 것들이며 십자가 위에 내려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와 자신의 민족만이 우수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생각이 이젠 헬라인도, 로마인도, 유대인도 그리고 이방인도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변화를 돌아본다. 왠지 우리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마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만을 고집하고 차별했던 모습 같아 보여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그러나 신앙의 완숙함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이 귓가에 들려오게 된다. 참된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 그들의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긍휼함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이와 같은 사실을 기억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