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5:2~3에서 보면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고 아비가일과 나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온에서 5리정도 떨어진 갈멜이라는 곳에 다윗이 육백 명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고 훗날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멸하고 거역하여 불순종했고 오히려 자기를 추켜세워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아말렉과의 전쟁을 자기 전술과 전략으로 이긴 것처럼 자기 이름으로 공덕비를 세우기도 하고 하나님이 철저히 금하셨음에도 아말렉 사람들의 가축들을 골짜기에 자기 몫으로 숨기기도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세움 받고 쓰임 받는다고 다 된 것이 아니라 교만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공덕을 치하하고 자기이름으로 행세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부득이 그를 버리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사울을 이미 버리시기로 작정하시고 이스라엘 왕의 후계자로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늘 성령충만하여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또한 맡겨진 양떼를 돌봄에 있어서도 맹수들과 싸우면서까지 목자의 사명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목숨보다 귀한 것으로 여겨 신앙인격적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맘에 들어 하셨습니다.
이런 다윗을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에게 망명생활의 훈련을 시키시는 과정입니다.
무용(武勇)에 뛰어난 600명의 용사들이 다윗왕조를 세우기 위하여 훈련하고 있었던 곳이 갈멜이었습니다.
다윗은 근처에서 양과 염소를 돌보고 있던 나발의 목자들을 당시 강도들이 들끓었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로 하여금 해치지 못하게 지시하고 더불어 목동과 양떼까지 보호하여 지키게끔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발의 양털 깎는 날이 되어 갈멜에서 양털을 깎고 있었습니다. 유목민들에게는 양털 깎는 날이 수입이 생기는 소망적인 날이라 큰 잔치를 베풀고 지나가는 나그네까지도 넉넉히 대접함으로 그 즐거움에 참여하도록 하여 인심을 후히 쓰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삼상25:5~8)”고 그의 부하 열 명을 나발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25:10~11)”고 합니다. 그는 빈정대며 주인에게서 떠나 반란을 시도하여 갈라져나가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이 있다고 다윗을 빗대어 욕을 한 것입니다.
나발의 미련함은, 첫째로 하나님이 성령을 충만케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사람인 다윗을 몰라본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가축들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계십니다. 나발의 세 번째 미련함은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 것인지에 대한 분별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발의 이런 미련함에 빈손으로 돌아온 다윗의 부하들을 보고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사백 명 가량은 칼을 차게 하고 그들을 죽이러 올라가고 이백 명은 그 소유물 곁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도 실수였습니다. 자신이 그들의 목동과 가축을 돌보아준 것에 대한 응당한 댓가로 생각한 다윗은 나발이 자기를 모욕하고 무시했다고 생각하여 감정적으로 대처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9~20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하셨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의 종으로부터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삼상25:14~17)”고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서둘러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다윗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나발을 향해 가고 있는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본문의 내용과 같이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자신의 남편 나발이 너무나 서운하게 대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쓰실 계획을 압니다. 곧 왕이 되실텐데 왕좌에 오르시게 되면 이런 미련한 사람 때문에 피 흘리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왕의 허물이 될까봐 이처럼 사정하고 비오니 미련한 자들을 죽일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런 피흘림을 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하고 다윗에게 하나님을 인식시키는 말을 합니다.
이에 다윗은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삼상25:32~34)”합니다. 그리고는 그 음식을 받고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청을 허락했다고 말을 합니다.
아비가일이 그 남편 나발에게로 가보니 왕의 잔치같은 잔치를 하며 술에 크게 취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바로 말하지 않고 다음날까지 기다려 술이 깬 후에 말을 해줍니다.
신앙적인 지혜는 반드시 해야 할 말도 상황과 때를 분별하고 상대를 잘 알아 상대가 영적인 유익함으로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신앙인격으로 슬기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남편 나발이 다음날 아침, 술이 깨어 일어났을 때 전날에 있었던 일을 설명합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다 들은 그는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어 열흘 후에 죽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나발의 어리석음을 통한 아비가일의 신앙지혜를 본받으라고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교훈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게 대적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아비가일은 그 남편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거역하다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회개할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나발과 같이 없애버리십니다.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은 예수님과 영원한 영적신부가 되도록 예수님의 짝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의 목자인 목사들은 오로지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 그 교회에 속한 양 떼가 모두 하늘나라 가도록 하기 위하여 진액을 다하여 애쓰고 있다면 이런 목자의 뜻을 따라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