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가고 목회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너나를 불문하고 인간이 얼마나 유약하며 모순 덩어리인가를 실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의 실상을 알아갈수록, 지난날 믿음이 약한 교인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책망으로만 일관했던 것에 대해 사려 깊지 못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분명 중생의 체험도 있고 은혜에 보답하려는 결의도 있었지만, 몸에 배인 구습, 심리적 유약성, 좌절스러운 환경에 대한 미숙한 대처 등으로 넘어지고 좌절했던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유보적 칭의론' 같은 신율주의의 채찍으로 닦달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것 같아 측은지심이 듭니다. 오늘 교회 안에는 선한 열매를 맺는 성숙한 성도들도 있지만, 고린도 교인들처럼 육에 속한 어린 성도들도 많습니다. 구원은 받았음에도 미성숙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 채 패배와 무력감에 젖어 삽니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는 속담처럼 채찍은 잘 달리는 말에게 필요한 것이지, 무력감과 한계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채찍을 가하면 아예 멈춰버리거나 날뛰게 하는 파괴적 결과만 초래할 뿐입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각 사람의 수준에 맞는 맞춤식 도제 교육을 하셨습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자처한 바리새인들에게는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독설했지만, 율법의 정죄를 받아 죄의식으로 주눅 든 세리, 죄인, 창기들에게는 더 없이 관대했습니다. 이미 충분히 율법의 가책을 받은 그들에게는 더 이상 정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분명히 믿음도 있고 구원의 확신도 있지만 여러 유약함으로 인해 미중생자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격적 미성숙자, 심신 미약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감정 제어가 잘 안되고 의지가 박약하여 교회 안팎에서 돌발적이고 미성숙한 행동을 보이므로, 곧잘 구원받지 못한 자로 치부됩니다.
반면 도덕적이고 모범적이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너무도 완벽해 훌륭한 랍비로 존중받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천국 입성에 2%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겉모습에만 의거하여 판단할 수 없는 각 사람만의 상황이 있음에도, 천편일률적 잣대로 사람들을 규정하고 그 잣대에 맞지 않는자들을 싸그리 정죄해 버리며, 그 책임을 이신칭의를 강조한 설교자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불합리해 보입니다. 그리고 대안이랍시고 내어놓는 것이 '유보적 칭의론' 같은 신율주의니, 그들에게서 백면서생(白面書生)의 한계를 봅니다.
더구나 오늘 한국 사회는 '헬조선(Hell朝鮮)'이라는 유행어가 돌 정도로 높은 경쟁지수, 취업난, 결혼난, 교통난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 지수가 하늘을 찌릅니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제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일 정도입니다. 설사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율주의의 채찍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적 위로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열매를 얻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 역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우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그리고 그들은 왜 유독, 한국 그리스도인의 허물만을 타깃으로 삼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유보적 칭의론자들'이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이신칭의 논쟁을 일으킨 계기는. 세월호 사건과 사고 수습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세월호 사건의 중심에 한국 기독교인들과 값싼(?) 이신칭의를 가르친 설교자가 있었나 봅니다.
이런 진단의 배후에는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하의식 같은 것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듭니다. 한때 유행했던 "똥도 미제가 좋다"는 속담처럼, 한국제 기독교는 열등하고 미국제 기독교는 우등하다고 보는 '영적 사대주의'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원죄를 받아 난 전적 부패한 죄인에게 한국인, 미국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민의식, 도덕성 같은 것이야 종교나 교육으로 얼마든지 배양할 수 있으며, 그런 학습으로 체화된 매너는 신앙의 본질도 아닙니다. 누구든 배부르고 등 따시면, 있는 자의 여유로움으로 고양된 시민의식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는 다 원초적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고, 자신의 아킬레스건이 공격당하면 숨겨진 맨얼굴이 나옵니다.
열악한 한국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을 무시한 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제 기독교의 잣대로 일률적으로 한국 기독교를 평가할 순 없습니다. 정말 꼭 한국인 미국인을 구분지으며 교양의 잣대로만 한국 기독교인의 열성(劣性)을 꼬집고자 한다면, 해 줄 말이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 가치관이 혼재돼 있고, 스트레스 지수가 세계 최고인 한국은, 기독교 국가인 미국처럼 아직 총으로 한자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는 그런 일은 아직 없소이다."
최근 세월호를 위시해 한국 사회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접근하는 그들의 방식에 대해서도 지적하고자 합니다. 이미 언급했듯 유보적 칭의론자들은 세월호 사건을 전체 한국교회의 수준 탓으로 돌리지만, 세월호 사건은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 사회의 총체적 문제의 표출이었습니다(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니기에 한국 사회의 문제를 기독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에 입성했지만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전체 한국인의 의식과 맞물려 있습니다.
예컨대 선박 운항을 감독하는 해양수산부의 무능과 부패(최근 세월호 인양작업과 함께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불법적인 선박개조로 세월호는 더 이상 사람을 싣는 객선이 아닌 화물선이었으며, 사고는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위기에 대처하는 정부의 위기관리시스템 부재, 사회와 개인의 책임의식, 사건 당시 특수한 사회심리학적 요인 등 다양한 원인들로 이루어진 복합적 결과물이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모든 사고는, 삼위일체의 복합적 요인들로 생겨나지 결코, 한두 가지 원인만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슨 문제가 불거져 원인규명과 해결책을 모색할 때는, 각계의 다양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통합 솔루션 시스템(total solution system)을 가동합니다. 그런데 전문 식견을 가진 신학자들이 세월호 문제를 접근할 때 유독 그리스도인의 칭의 문제에만 결부시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학자적 소양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들이 정말 전문 식견을 가진 신학자라면, 그리스도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정부를 향해서도 당연히 책임추궁을 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신칭의' 교리를 '값싼 구원' 운운하며 폄하하는 데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고자 합니다. 개혁주의 교회가 이신칭의를 고수하고 유보적 칭의론 같은 신율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손쉬운 구원 공식에 '홀릭'돼서도 아니고, 성도들의 비위를 맞춰 교회 부흥을 도모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신율주의는 그것이 '대속의 공로의 위대성'과 '인간의 전적무능' 교리를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대속의 공로의 위대성'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 위에 세워진 이신칭의에 낡아지는 옷 같은 인간의 의(義)를 덧댈 수 없다는 것이고, '전적무능'이라 함은, 부패한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신적 의(義)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500년 전 종교개혁자 루터가 이신칭의 교리를 주창하게 된 역사적 경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루터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의롭게 되려는 율법적 노력을 기울이다가 절망하여 거의 정신병적 상태에 이른 후, 성 어거스틴(St Augstine) 수도원 종탑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시 22편)을 깨달은, 소위 '탑 경험(Tower Experience, Tunnerlebnis)'입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