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들에게는 마사다가 매우 상징적이며 중요한 곳
마사다 요새는 450미터의 고지대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

◈마사다(Masada)의 역사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유대교의 파벌 중 하나인 열심당원이 이곳에 주둔하던 소수의 로마 수비대를 쫓아내고 인근을 거점으로 삼았다. 긴 전쟁 끝에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되자 도망쳐 온 열심당원의 지도자인 엘리에젤 벤 야일(Eleazar ben Yair)이 소수의 유대인과 열심당원을 포함한 960명을 데리고 마사다를 최후의 거점으로 삼아 로마에 대항해 게릴라를 시작, 로마군은 유대전쟁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정예군단인 제 10군단 9천 명과 유대노예와 노역인 6천 명인 총 1만 5천 명을 동원,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 장군에게 요새 함락을 명했다.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자 일단의 유대인 저항군이 주둔하고 있던 로마수비대를 몰아내고 이 요새를 차지했으며 당시의 지도자는 에리아자르 벤 야이르였다고 한다.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다른 유대인들과 그 가족이 마사다로 피난해서 합류했으며 2년 동안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로마군과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다른 유대인을 공격했다.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이끄는 로마 제10군단이 마사다로 진격했다. 여러차례 요새를 공격했으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에 로마군은 서쪽의 고원과 같은 높이의 거대한 성채를 쌓아올려 공성을 준비했다. 요세푸스는 그가 기록한 다른 전투와는 달리 이 전투에서 유대 저항군의 반격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마사다의 저항군이 로마군에 대항할 전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다른 역사학자들은 로마군이 성채를 쌓을 때 같은 열심당인 유대인 노예를 이용했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향이 다분한 열심당원이 차마 동족을 죽일 수 없었다고 보고 있다.

73년 드디어 공성을 위한 성채가 마련되자 로마군은 공성기를 이용해 성벽 일부를 깨뜨리고 요새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창고를 제외한 요새 안의 모든 건물이 방화로 불에 탔고 엄청난 수의 자살한 시체들만 즐비했다. 유대인 율법은 유대인의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였으며 최후에 2인이 남자 한 명이 죽이고 남은 한 명은 자살했다고 한다. 다른 건물을 모두 불에 태우면서도 식량창고만은 남긴 것은 최후까지 자신들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한 것이지 식량이 없거나 죽을 수밖에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사다에서 살아남은 것은 여자 두 명과 다섯 명의 아이들뿐이며 로마군은 그 무서운 자살 광경에 겁을 먹고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마사다와 대항쟁

대항쟁 시대의 마사다의 역사는 그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았던 두 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을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마사다는 대항쟁이 시작되던 66년에 열심당 중에서도 매우 과격한 분파였던 시카리(Sicarii)에 의해 점령됐다. 시카리라는 말은 라틴어 Sicarius의 복수형인데, 그 의미가 “단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옷 주머니에 늘 단검을 지니고 다니면서 언제라도 싸울 준비, 급습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이 시카리의 지도자는 엘르아잘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 )였다. 이 시카리들은 같은 유대인 중 항쟁 그룹 안에서도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포위 당했던 때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시카리들은 유대인 그룹들 안에서 서로 의견들이 갈라지면서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예루살렘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멸망하기 바로 직전에 시카리들과 그 가족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 이미 그 곳에 66년부터 주둔해 있던 시카리들과 합류했다.

마사다

티투스에 이어 로마군을 이끈 실바(Silva)가 유대인 반란군의 마지막 무리들이 모여있는 마사다로 72년에 진군해 갔다. 15,000명의 로마군들이 고작 960명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만큼 마사다가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상징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고, 그 만큼의 병력이 있어야 점령할 수 있는 곳이었다. 로마군들은 먼저 마사다에 있는 시카리들을 고사(枯死)시키기 위해 마사다를 둘러싸는 포위 성벽을 쌓았다. 수천 톤의 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로마군들은 직접 마사다 안으로 진입하기 위한 군사적인 용도의 비탈길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비탈길의 위치는 비록 깎아 지르는 절벽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은 공사기간이 소요될 서쪽 절벽을 선택했다.

유대인들 중 실질적인 전투인원은 극소수였지만 마사다 요새는 450미터의 고지대에 지어져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사방이 절벽인데다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뱀처럼 꼬인 좁은 길 뿐. 5미터가 넘는 높은 성벽과 20미터가 넘는 37개의 망루까지 있어 단순한 공격만으론 점령할 수 없는 난공불락지이다. 요새를 포위한 후, 수십 배에 이르는 병력으로 2년 동안 공격했지만 마사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사다 요새는 너무나도 높은 곳에 위치해 로마군이 자랑하는 공성전으로는 점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요새가 위치한 유대 광야는 전투를 계속하기에 좋은 기후가 아니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실바 장군은 마사다에서 가장 낮은 성벽이 위치한 서쪽에 툭 튀어나온 바위산을 중심으로 15,000명을 동원해 마사다와 비슷한 높이의 토산(土山)을 쌓기로 했다. 토산을 쌓아 공성병기가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만들고, 토산에서부터 흙과 나무를 차근차근 쌓아 마사다까지 이어지는 비탈길을 만든 뒤 공격해 올라가는 무식한 방식이었다. 천 명도 안 되는 유대인들로서는 그 많은 병력이 토산을 쌓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6개월 후 토산과 비탈길이 완성되어 성벽이 무너지자 유대인들은 최후의 수단을 택한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 자살을 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서로를 죽여주기로 했다. 생존자 중 성인 남성들이 자기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모인 뒤, 10명의 지도자를 뽑아 나머지를 모두 죽이게 했고, 남은 10명은 제비뽑기를 하며 한 명씩 죽인 뒤, 마지막 한 명은 로마군에서 식량과 무기가 넘어가지 않도록 마사다에 불을 지르고 자살하여 모두 시체가 되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고 허겁지겁 요새로 올라갔지만 그곳에서 본 건, 사망한 유대인의 시신뿐이었다. 그럼에도 생존자가 있었는데 하수도길(혹은 우물, 동굴 등)에 숨어 있던 5명의 어린이와 2명의 노파였다. 로마군은 목숨을 구걸하지도, 노예가 되는 치욕도 불사한 유대인들의 용기에 보답해 이들을 살려 주었다.

마사다

전쟁사에서 이런 고지대에 위치한 성과 요새들은 포위당한 후 물, 식량부족으로 인해 끝나기 마련이고 로마군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헤롯 대왕은 마사다를 비롯한 주변 광야가 대부분 석회로 이루어져 빗물이 땅에 흡수되지 않고 고인다는 사실을 알고 빗물이 흘러 내려가는 지점을 막아 물 저장고로 만들었다. 우기마다 수만 리터의 물이 쌓이는 마사다였고 곳곳에 만들어 둔 물 저장고는 총 750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기에 목욕탕과 사우나를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마사다는 물이 풍족했다.

식량 또한 수년을 먹을 수 있도록 포도주, 기름, 곡물, 과일 등이 보관되어 있는데 마사다의 특이한 기후와 창고의 설계가 맞물려 저장 기간도 백년이 문제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평평한 광야인 마사다 정상을 이용해 중앙엔 밭도 일구고 있었다고 하니 식량 문제는 없었다. 비둘기 집을 만들어 두어 각종 조류를 식량 겸 배설물을 이용해 연료로 썼다고 하니 로마군이 수년을 포위하고 있더라도 먹고 살기에 문제가 전혀 없는 장소였다.

기후도 로마군이 버티기엔 무척이나 힘든 장소였다. 유대 광야는 여름에는 50도가 넘는 기후에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황무지라 물은 물론 식량 공급도 원할 하지 못한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