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없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의 역량을 키워주기 위해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으로 학교는 항상 태풍주의보였고, 학교 수업으로 부족하니 방과 후에는 학원으로 다시 등교하는 자녀들의 진풍경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우리 집도 공부를 끝내고 직장을 다니는 자녀가 둘이고, 아직 공부하는 자녀가 둘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 레슨, 혹은 태권도는 잠시 보낸 적은 있어도 매일 방과 후 공부시키느라고 쫓아다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갖는 기대심은 때론 감사로 그리고 더 많은 경우는 실망 내지는 체념으로 다가올 때가 많았습니다.
쓰레기통 수거하는 날, 잔소리 안 해도 아침 일찍 밖으로 내놓는 아들을 볼 때는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하지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또 저녁 식사 후 엄마가 좀 피곤해 보이면, 알아서 설거지를 척척 하는 딸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릅니다. 얼마 전 휴가를 받아 동부에 다녀온 아들이, 난생 처음으로 아빠에게 선물을 하나 사 왔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라, 저는 아들이 사고 친 줄 알았습니다. 걱정은 잠시, 아빠를 위한 순수한 선물이었음을 알고,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뿌듯함이 몰려왔습니다. 문제는 엄마 선물은 없었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제 시작이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아빠 선물을 보며 대리 만족을 해야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147세의 할아버지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자기 손자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손을 뒤집어서 차남에게 우수를 장남에게 좌수를 얹어 엇갈린 축복을 합니다. 아들 요셉이 바뀌었다고 말리지만, 할아버지 야곱은 엇갈린 손을 바꾸지 않고 축복기도 합니다. 저는 아들의 선물을 받아들고, 그 ‘엇갈림’에 대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자녀들은 늘 기대가 엇갈리는 서프라이즈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투자한 만큼 받아내는 자판기 같은 자녀들이 아니라, 복권 당첨된 것처럼 세상 부러운 것 없는 축복으로 부모를 놀라게 하는 ‘엇갈림’의 주인공이 자녀들입니다.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엇갈림의 길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는 기대에서 완전히 어긋난 축복을 받아 오늘도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나는 나란한 두 직선이어야 했습니다. 예외도 없고, 원리원칙대로 인과응보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직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두 직선이 엇갈립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던 날, 지진과 함께 꺾인 두 직선이 엇갈린: crossed 날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우리는 엇갈린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어쩌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오며 순수한 선물을 들고 나오게 되었는데, 하늘 아버지께서 천하를 다 얻은 양 좋아하실 것 같아 마냥 부끄러워지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