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 속에는 많은 고통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려워합니다. 어떤 이는 물질의 문제로, 어떤 이는 인간관계의 고통으로, 어떤 이는 환경적 요인의 아픔으로, 어떤 이는 죄의 문제로 몹시 힘들어 합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우리의 인간적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며 고통의 분량을 채움으로써 극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 누구에게나 그 고통의 분량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안타깝게도 빨리 빠져나갈 수 있는 속성의 방법이 없으며 오직 고요히 잔잔히 털 깎는 자 앞에서의 잔잔함처럼 침묵을 지키며 인내함으로 그 순간을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광야를 잘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광야의 때에 자기만이 겪는 고통처럼 하소연하며 울며 안타까워하며 위로를 구하며 안절부절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광야의 기간을 길게 할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고요함과 잔잔함 속에 머물 때 인간적인 욕심은 소멸되고 영성이 깨어나기 시작하며 고난과 훈련의 기간은 서서히 끝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이런 혹독하고 고된 훈련이라 할지라도 이를 변호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무사히 통과한 자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으며 생명의 통로로써 사용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뜬히 넉넉하게 합격하여 통과하는 자는 너무도 적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많은 이들이 생명의 사역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사역의 방법을 찾고 테크닉을 찾으며 속성의 비결을 찾지만 그 진정한 비결은 광야에서의 고요함과 인내이며, 그 분량이 차기까지 입을 벌리지 않고 영혼의 메마름 속에서 주님만을 갈망하는 것인데 이런 고요함과 인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어느 날 훈련이 끝나는 때가 오면 그것은 오직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이 이를 때까지 우리는 광야에서 숨을 죽이고 주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이 보이지 않아도 아무 위로가 없어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의 기간을 통과할 때는 광야의 기간이 짧기를 바라지만 고통의 시간이 멀기만 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지나간 30여년의 광야 기간을 생각하니 인내함과 잔잔함으로 기다리지 못했던 시간이 신앙의 철없는 어린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감사로, 털 깎는 자 앞에서 고요히 잔잔함처럼 어떤 광야 시간도 넘어 가는 것이 다 주님의 은혜라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없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감사하면서 기다리면 성령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 다는 방법을 몰랐던 지난 시간들이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