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인간의 치명적 한계를 의연하게 극복할 수 있을까? 죽음은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되는 변치 않는 인간의 운명이며, 치명적 한계이다. 성경은 죽음을 죄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의인으로 살아도 그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어릴 적 비신자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해도 인간의 한계점인 죽음 앞에서만은 의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꼭 그런 것 만은 아닌 것 같다. 죄의 결과에 대한 심판이 죽음이라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죽음을 의연히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윌 할아버지의 의연한 안락사
최근 한 언론을 통해 안락사를 통해 의연히 죽음을 맞이한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윌(Will)'이란 노인의 이야기가 소개된 적이 있다. 폐암에 걸린 그는 안락사로 인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그가 죽음을 맞이할 그날, 가족의 분위기는 장례식장과 같지 않고 오히려 파티를 연다. 마지막 아버지가 가는 길을 가족들이 기뻐하며, 축하해준다. 파티가 끝난 후 윌은 병원 안락사실로 혼자 들어선다. 아버지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던 가족들은 참았던 눈물을 흘리고, 주사실 안에서 떨리는 간호원의 주사 바늘을 보며 오히려 그는 준비되었다고 간호사를 안심시키며 의연히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죽음이란 인간의 한계를 정복한 승리자의 모습과 같다. 죽음이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라는 성경의 선고를 무색하게 하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 폴리캅 그리고 이슬람 자폭 테러리스트
플라톤의 설명에 의하면 아테네의 감방에서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떨지도 않고 안색이나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독약이 든 잔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그 잔을 입술로 가져가 매우 즐겁고도 담담하게 그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셨는데,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부조리한 행동을 나무랐고, 오히려 평온을 유지하며 용감하라고까지 그들을 격려했다. 그는 아무런 죽음의 공포와 저항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2세기 중엽의 서머나 감독 폴리캅 역시 80세 후반의 노령에 화형을 당하는데, 예수를 부인하기만 하면 살 수 있었음에도 그는 의연히 죽음을 선택했다. 오히려 불이 붙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다. "오 아버지, 내가 순교를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여겨주시니 주를 찬양합니다." 그리고는 불 붙이기를 꺼려하는 간수에게 어서 불을 붙이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죽음 앞에서 비열하고, 공포스러워 하기 보다 오히려 몸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눈을 뜨면 세계 곳곳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극단 세력의 젊은이들의 뉴스를 듣고 있다. 그들은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자신의 젊은 생을 한 줌의 재로 마감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죽음의 공포를 너무나 의연히 이겨낸다.
문제 제기
이렇게 죄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조차 의연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사뭇 당황할 수 있다. 죄의 결과로 죽음이 주어졌는데, 그 죽음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혹시 성경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삯이란 그냥 후대에 유대 편집자들이 협박용으로 추가한 그들만의 교리는 아닐까? 만약 죄의 삯이 사망이란 성경의 정의가 사실이라면 그 사망 앞에서 죄인들은 벌벌 떨고, 그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말이 앞뒤가 맞는데, 저들의 의연한 행동은 그 모든 성경의 정의를 비웃는 것 같이 보인다.
예수가 죽음을 맞이한 장면
더 당혹스러운 것은 예수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위에서 우리가 나열한 죽음을 의연히 맞이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등의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신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모습이다. 예수님의 믿음이 그들보다 부족했기 때문일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지막 절규는 그 두려움의 절정을 표현한다. 폴리캅과 같이 '어서 불을 붙이라'고 큰 소리 치시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절규 속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라고도 부르지 못했고, 하나님이라는 낯선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셨다. 뭐가 그렇게도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지나가게 해 달라는 잔의 저주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예수와 우리 인간이 겪는 죽음은 본질적으로 너무나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저주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는 심판의 결과였다. 아니 심판 그 자체였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구약 에스겔서의 유명한 '잔의 노래'(겔 23:31-33)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진노의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로써의 '잔'이다. 그 진노의 형벌을 자신이 받는다는 것을 구약적 표현을 사용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참고: 시 75:8, 요 18:11).
무서운 하나님의 유기
예수의 죽음은 이와 같이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여 받으신 심판의 저주, 즉 '하나님의 유기'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려짐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라는 고백을 드린다. 우리 한글 신앙고백서에는 빠져있지만 영어 사도신경에 보면 '장사되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 사흘 만에'가 추가되어 있다. 그것은 어떤 사도신경 사본에는 그것이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각 나라에서 받아들이고 인정한 사본에 따른 번역으로 그런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십자가 위의 예수가 그만큼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 즉, 유기를 당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앞에서 본 죽음 앞에 의연했던 인간들이 경험한 죽음과는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무게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유기 앞에서 두려워 하시는 예수를 테러리스트들 보다 더 연약한 겁쟁이로 오해할 수 밖에 없다.
죽음은 십자가 유기(심판)의 모형일 뿐, 죽음 이후에 최후 심판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의 죽음은 차후 우리가 받을 심판의 모형이지, 심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심판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죽음 자체가 심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매 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도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고백한다. 죽은 자는 하나님과 영원한 단절 속으로 들어가며, 산 자는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죽음이 끝이 아니요, 그 이후 심판과 정죄가 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겪는 죽음보다 심판 이후 겪게 될 하나님과 단절이 훨씬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땅에서의 다시 삶(거듭남)도 십자가 부활(구원)의 모형
재미있는 것은 그 명제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이 땅에서의 거듭남은 십자가 부활 즉, 마지막 심판 날의 최종 구원의 모형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죽음'이 '심판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 죽음의 반의어인 '살아 남' 즉, '거듭남'은 심판의 반의인 '구원의 모형'이라는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거듭남의 기쁨, 구원의 기쁨은 장차 우리가 심판대 앞에서 맞이할 '넌 내 아들이야'라는 구원의 최종 선포 때 경험할 기쁨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인간들이 맞이하는 죽음이 최종 심판대에서의 유기 선포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똑 같은 이치로 말이다. 이 땅에서 경험할 두려움의 최고 경지인 죽음이 앞으로 종말에 맞이할 유기의 심판을 상징하는 모형에 불과한 것처럼, 이 땅에서 경험할 기쁨의 최고 경지인 거듭남이 앞으로 맞이할 심판대 앞에서의 최종 구원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 믿는 기쁨이 고작 이것 밖에 안되냐는 푸념을 늘어 놓을 필요가 없다. 거듭난 후에도 매일같이 변덕을 부리는 이 마음으로 천국 생활을 영원토록 해야 하냐는 불평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맞이하는 그 무엇도 하늘의 실체를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기에, 우리는 삶과 죽음 속에 담겨진 진리의 조각들을 성경의 계시에 비추어 믿음으로 내 속에 담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유기를 통해 보여진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감격
복음서에 표현된 예수의 두려움 역시 우리는 그렇게 담아내야 한다. 예수가 역사 속에서 어찌 보면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한 다른 인간들에 비해 초라해 보이고, 연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으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신 것을 적나라하게 역사 속에서 보여주신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장차 받을 죄 용서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시려는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기로 말미암은 예수의 죽음을 묵상해야 한다. 성부의 입장에서 아들을 버리는 아픔과 성자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버림을 당하는 고통을 모두 유심히 살펴야 한다.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유기로 인해 우리에게 보여진 예수의 그 연약함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구원의 소망이 되는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