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좋아하기는 좋아하는데, 스킨십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커플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신앙·외모·조건까지 모두 좋은데, 그와 둘이 있을 때면 멈출 수 없는 그 끈기와 추진력(?)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자꾸 스킨십이 깊어질수록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다가 헤어지게 됐다는 상담도 많이 있었습니다. 연인의 스킨십이 뭐기에 하면 할수록 힘들어지기도 하고 전혀 안 하면 그것도 정상은 아니라고 여겨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크리스천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드려 봅니다. 하나님께서 스킨십을 하라고 하셨을까요? 하라고 하셨다면 왜 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우리에게 기쁨과 유익이 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들에 대하여 성경적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의 스킨십은 진리 안에서 자유(요 8:32)를 얻음으로 평안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킨십에 관하여 '한계선'을 아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유익함'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또 한 가지 더 묻고 싶습니다. 가벼운 뽀뽀 정도로 스킨십의 한계를 정해 놓고 잘 지키는 커플은, 결혼 이후의 성에 있어서도 아무 문제가 없이 온전한 하나됨을 이룰 준비가 잘된 것일까요?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킨십 자체가 별로 재미도 없고 유익하지도 않으면서 전혀 소중하지도 않다면, 이렇게 얘기를 꺼낼 필요도 없겠지요. 하지만 연애 속의 스킨십에는 그냥 모르는 척 없는 척하기에는 너무도 큰 기쁨이 있고, 그것을 통한 유익도 매우 큽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스킨십의 한계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가득하거나, 연인끼리 스킨십을 하면서도 기쁨과 신뢰가 쌓이기보다는 성경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인해 불신과 갈등만 깊어져서, 연애 단계에서 반드시 누리고 확인해야 할 소중한 스킨십의 유익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리스천 연애의 스킨십에 관하여 성경적 관점으로 말씀을 나눠 보고자 합니다.
스킨십의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몸이 피곤할 때 안마를 받고 싶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그 욕망의 근본 원인은 성욕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욕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왜 있는 것일까요? 이런 부분을 알기 위해서도 성경 말씀을 봐야 하겠는데요. 일단 누가 만든 것인지부터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성욕은 음란마귀 사탄이 뿌려 놓고 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겠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 주신 두 가지 명령, '생육하고 번성(창 1:28)'과 '하나됨(창 2:24)'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성을 만들어 주셨다면 그 안에는 당연히 '성욕'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성욕은 근본 하나님의 나라(막 1:15)를 세우기 위하여 주신 거룩한 본능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성에 관한 모든 것에 입을 다물고, 성경 안에서도 성과 관련된 말씀들을 모두 외면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계략에 빠져 버린 음란함을 성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게 되어서 '성욕'을 '음욕'과 동일시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성욕과 음욕은 엄격하게 구분됩니다. 그 결과의 기준은 생명과 하나됨,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가 파괴하는가에 있습니다.
연인이 서로의 마음과 함께 그 몸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특별한 섭리입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라는 명확한 명령(창 2:24)도 있고,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 담겨 있는 아가서에는 그 사랑을 표현하는 구절구절마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스킨십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이런 연인의 마음을 성경은 아주 자세하게 담고 있습니다. 아가서의 영어 제목은 "Song of songs(아 1:1)"입니다. 노래 중의 노래! 스킨십은 연인과 결혼과 가정에 큰 유익이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다음에는 스킨십의 유익과 한계에 대해서 더 자세히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크리스찬연애대책연구소 이화섭 소장(필명 '모랑살': 모두 함께 사랑하며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