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복음: 신약의 외경 중 마리아 복음이 있다. 마리아 복음은 3세기(헬라어)와 5세기(콥트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며 옥시린쿠스 파피러스와 라일랜즈 파피러스, 그리고 아크밈 사본에서 발견된다. 내용은 영지주의적 요소 및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부분이 많이 나타나 성령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고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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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 마리아 복음서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환상을 통해(ἐν ὁράματι) 만난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οὓς ἡμεῖς οὐκ ἠκούσαμεν) 특별한 가르침을 은밀히(λάθρα) 받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마리아가 전한 환상을 통해 받은 가르침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가르치셨던 내용과 모순(ἑτερογνωμονεῖν)된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챈 안드레는 (1)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하실 말씀을 한 사람에게만 비밀스럽게 주셨을 리 없고, (2)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로 모순될 리 없으며, (3) 예수님께서 여자를 남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리 없다는 이유로 마리아를 의심한다. 베드로 역시 안드레와 비슷한 이유로 마리아가 받은 계시를 의심한다. 속이 상한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이런 계시를 거짓으로 꾸며낼 리 없고, 또한 예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리 없다고 주장한다. 여자의 눈물 앞에 장수가 있던가? 마리아의 눈물을 본 레위는 베드로의 욱(ὀργίλον)하는 성격을 나무라며 마리아를 원수처럼 대하지 말라고 말한 후 예수님께서 그녀를 사랑하사 존귀하게 여기셨으니 베드로는 그녀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어떤 기준으로도 그녀를 판단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결국 복음이나 전하자는 레위의 말에 무리는 아무일도 없었던 듯 해산된다. 이것이 마리아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이다. 나는 마리아 복음서를 통해 현대 교회와 이단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리아 복음서 속의 마리아정통 기독교의 관점으로 볼 때 마리아는 이단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가르침을 참된 계시처럼 전했기 때문이다. 이단이 기성 교회로부터 나왔듯이 마리아도 예수 공동체로부터 나왔다. 이단이 기성 교회의 가르침과 비슷하지만 몇 가지 "더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첨가했듯이 마리아도 기존에 들었던 복음 위에 "더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첨가했다. 아무도 듣지도 못했던 특별한 비밀을 예수님으로부터 은밀하게 홀로 받았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전하는 모습까지도 같다. 조금 더 생각을 확장해 보자. 마리아의 환상은 두 개의 논리적 가능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 째는 환상을 꾸며냈을 경우이다. 이럴 경우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영적 특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성도로써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이다. 둘 째는 환상을 진짜로 봤을 경우이다. 이런 경우, 그녀는 악한 영의 교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분별하지 못해 참된 교리처럼 수용한 것이 된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며 배웠던 진리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마리아는 교만했던가 영적으로 무지했다.

나는 이것이 이단이 출현하는 두 개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단의 교주는 영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계시에 대한 거짓말을 했다가 플러시보 효과에 취해 거짓말을 진짜로 믿게 되거나 혹은 말씀의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악한 영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분별 못해 진짜처럼 받아들인다. 마리아처럼 교만했던가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복음서 속의 안드레와 베드로 안드레와 베드로는 마리아가 전하는 계시를 듣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아 차렸고, 하나님의 계시는 한 사람에게만 비밀스럽게 임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지적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 정황적 오류에 빠진 것이다. 정황적 오류란 개인의 신념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 정황을 해석하는 오류를 말한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계시가 임한 사건을 예수님께서 여자를 남자보다 위에 둔 사건으로 이해한 것은 명백한 정황적 오류이다. 문제는 이때부터 배가 산으로 갔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리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림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악용한다. 그 결과 주변 사람들에게 동정표를 얻어내는데 성공함으로 자신의 편을 구축한다. 안드레와 베드로의 작은 실수가 모든 것을 망친 것이다.

이단과 대적하는 기성 교회는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기성 교회에는 말씀을 바르게 알기 때문에 이단들의 잘못된 해석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자들이 상당 수 있다. 그러나 이단과 맞대응 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범하게 되는 정황적 오류로 인해 이단에게 동정표를 뺏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나 역시도 교회에 들어온 이단들과 맞대응 하면서 범했던 사소한 실수로 인해 "나쁜 목사"가 된 적이 있다. 이단들은 내 실수를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로 연결시켜 악용했고, 결국 성도들의 동정표를 빼앗아 갔다. 이처럼 이단은 찰라를 놓치지 않는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혹은 의도적으로 만들고 있었다는 듯이 즉각적으로 행동한다. 우리가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실수하는 순간 그들은 미소지을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우리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다 해도 동정표를 빼앗기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 시대는 논리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마리아 복음서 속의 레위본문 속의 레위는 마리아의 흑기사이다. 마리아의 눈물을 보자마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 그는 베드로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마리아의 눈물에 넘어가 동정표를 던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은 레위가 베드로를 꾸짖으며 한 말들이다. 첫 째, 그는 베드로의 욱하는 성격을 들먹이며 베드로를 꾸짖었다. 본문 속에서 베드로는 욱하지 않았다. 정황적 오류를 범한 것을 제외하고는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논쟁했다. 그러나 레위는 베드로가 평소에 보였던 성격을 꼬집어 내어 그의 행동을 나무란다. 이것은 인신공격의 오류이다. 인신공격의 오류란 주장하는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개인의 특정적 요소를 사용하여 주장을 반박하는 오류이다. 안드레와 베드로가 범했던 정황적 오류는 마리아가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를 사용할 수 있는 틈을 제공했고, 이에 넘어간 레위는 인신공격의 오류를 통하여 마리아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둘 째, 레위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자는 발언으로 권징 받아 마땅한 마리아를 옹호하고, 어떤 기준으로도 마리아를 판단할 수 없다는 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쇄하며, 나가서 복음이나 전하자는 말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 한다. 보다시피 분할의 오류, 논점일탈의 오류, 미끄럼 틀의 오류 등으로 인해 배는 산의 정점까지 오르게 됐고 더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하게 됐다. 현장이 아수라 장이 된 것이다.

이단 논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지켜보는 성도들은 이 부분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에는 감정에 치우쳐 진리를 분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연약한 성도, 교회에 몰래 들어온 이단까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야 한다는 편향적 성도 등이 있다. 이들은 감정에 따라, 혹은 하나의 신관이 모든 신관이라는 편향성을 근거로 논쟁에 뛰어들어 불에 휘발류를 뿌리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교회는 아수라 장이 되는 것이다. 한 젊은 목사가 섬기던 교회에 몰래 들어온 이단을 내쫓은 적이 있었단다. 이단임을 발견하고 몇 달 동안 권면했지만 그들은 몰래 이단의 설교와 책들을 성도들에게 돌렸다. 목사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추방시켰다. 하지만 이단들은 눈물과 콧물을 빼면서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로 주변 사람들의 동정심을 샀고, 목사의 나이가 연소하다는 인신공격의 오류로 몇몇 성도의 마음에 공감대를 형성시켰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성도들이 목사를 경험이 부족하고 사랑이 없는 목사로 인식하게 되었단다. 이로인해 쫓겨난 이단들을 옹호하려는 자들도 생겼고, 몰래 심방을 다녀온 자들도 생겼으며, 그들을 다시 불러오자는 이들도 생겼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그러니 명심하자. 혹시 교회에 들어온 이단과의 논쟁에 확신이 서지 않는 성도들이 있다면 성급하게 논쟁에 뛰어들어 한 쪽 편을 들지 말라. 그대신 무릎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 분별이 되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선한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진리와의 싸움: 손자병법의 모공편에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이 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의미이다. 바둑의 세계에도 "지피지기면 백전불패 (知彼知己 百戰不敗)"라는 말이 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영적 전쟁의 대장이신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음을 아는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마태복음 10:16의 말씀이다. 우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뱀 같이 지혜롭"기도 해야 한다. 왜? 성도는 허공을 치는 권투선수처럼 무식하고 용감하게 싸워선 안되고, 고도의 명중력을 요구하는 단검 마카이라(μάχαιρα)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롭고 찰지게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중에 경찰이 한 명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국의 경찰들이 사이코패스의 행적을 추적할 때 다른 사이코패스에게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단다. 평범한 인간의 생각으로 사이코패스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이코패스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 다른 마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우리에게는 마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계시니 그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싸움에 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마귀는 우리보다 지혜롭기 때문에 우리의 지혜로 그를 이길 수 없다. 반드시 마귀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서만 그를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비결은 지속적인 기도생활과 말씀생활로 머리에는 예수님의 지성을! 가슴에는 예수님의 지혜를! 삶에는 예수님의 인격을 채워 넣는 것이다.

맺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를 깨기 위한 마귀의 작전은 점점 세밀해지고 치밀해 지고 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기괴한 방법으로 교회를 침투하고 있고, 예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황당한 방법으로 교회를 흔들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미숙한 논리와 모난 혈기로 싸움에 임한다면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될 것이다. 새로운 이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오는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극명하다. 머리에는 예수님의 지성을! 가슴에는 예수님의 지혜를! 삶에는 예수님의 인격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혜의 부족이나 논리의 부재, 혹은 인격의 미숙함으로 인해 교리의 전쟁에서 낭패를 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마름질하며 임해야 하는 것이 영적 전쟁인가 보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