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페르시아는 고레스(Koorush Cyrus B.C. 558-529) 왕에 의하여 건국됐다. 그는 바벨론을 정복하여 유다 백성의 귀국을 허락한 왕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레스가 세운 아케메
네스 왕조(B.C. 550-330)는 알렉산더에 의하여 멸망하고, 알렉산더 사후에 셀레우크스 왕조(B.C. 312-237)가 세워졌으나 반유목민이었던 파르티아족(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에 의하며 무너졌다. 파르티아 왕조(B.C. 247-224)가 500년 가까이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산 왕조(A.D. 224-652)에 의하여 멸망한다. 사산은 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 왕조를 무너트린 아르다쉬르(Ardashir, A.D. 180-242)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로 칭하였기 때문에, 그의 왕조에 '사산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정교일치의 강력한 집권 체계를 구축하였다. 사산 왕조는 무함마드의 후계자였던 아부바크르(Abu Bakr)에 의하여 멸망했다. 페르시아인은 원래 불을 숭배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접하게 되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자연신들까지 숭배하게 됐다. 기원전 7-6세기 무렵에 예언자 조로아스터에 의하여 신학과 우주관을 갖춘 종교로 조직됐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Zoroasternism)가 됐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페르시아가 무함마드 시대 이전에 아라비아 반도와 주변 국가들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아라비아 동북부는 7세기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페르시아는 무함마드가 속해 있던 쿠라이쉬(Quraish) 부족과도 연관이 있었다. 무함마드의 증조할아버지의 형제인 나우팔(Naufal)과 누탈랍(Nuttalab)은 쿠라이쉬 부족장으로 있을 때 페르시아 사람들과 조약을 맺고, 메카의 상인들이 페르시아의 영향 아래에 있던 이라크 및 고대 페르시아 지역인 파르스(Fars)와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A.D. 606년에는 아부 수피안(Abu Sufyan)을 리더로 하는 쿠라이쉬 부족이 페르시아의 수도에서 페르시아 왕을 만나기도 했다.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시작할 무렵인 A.D. 610년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와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 일부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 국가가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고 다른 국가가 비교적 무지한 상태일 때, 두 국가가 교류하면 전자가 후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무함마드 당시에 아랍은 상당히 무지한 상태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랍의 역사학자들은 이슬람 이전을 "무지의 시대"라고 부른다. 반면에 페르시아인들은 고대부터 고도로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페르시아가 아랍과의 교역을 통해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1. 밤하늘의 여행(Night Journey)
꾸란 17장은 승천(이스라)의 장이라고 불린다. 무함마드의 몸과 마음이 카바 신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일곱 개의 하늘을 지나 가장 성스러운 권좌에 올라감으로써,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의 정신적 신비가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일부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단순히 꿈을 꾼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슬람에서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슬람 전통의 다른 구체적인 사실을 추가하여 믿는다. 꾸란은 거듭 무함마드가 7층천에 갔다 온 것을 확증하고 있다(꾸란 53:12-18).
이슬람에서 무함마드가 승천했었다는 '밤하늘의 여행'의 큰 흐름은,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르다 비라프'(The Book of Arda Viraf)의 내용과 비슷하다. 이 경전은 이슬람이 시작되기 약 400년 전 페르시아 왕인 아르다쉬 바바간(Ardashir Babagan, 재위 A.D. 226-241) 때 만들어졌다. 이 문헌을 작성하게 된 동기는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페르시아 사람들의 믿음이 흔들리자, 조로아스터교의 성직자들이 이를 회복시키려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한 성직자를 골라서, 다양한 정결의식을 통해서 천국에 올라갈 준비를 시켰다. 그가 천국에 있는 것들을 보고, 또 자기들이 사용하고 있는 경전이 맞는지를 확인하고 오기를 바랐다. 그들은 젊은 성직자인 아르다 비라프를 선정했고, 그는 정결의식을 통해서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대천사장인 샤로쉬(Sarosh)의 인도를 받아 천국을 한 층 한 층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가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아후라 마즈다는 그에게 "다시 지구로 돌아가서 천국에서 본 것들을 조로아스터교인들에게 그대로 전하라"고 말했다. 그가 본 것들이 그의 이름을 딴 경전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아르다 비라프의 경전 7장 "별들의 층"(The Star Track)과 마지막 101장의 내용은 '밤하늘의 여행'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아브라함의 성서"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대천사장 미가엘이 땅으로 내려와 아브라함을 병거에 태운 후 하늘로 올라가 구름 위에 있는 60천사에게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병거를 타고 사람이 사는 지구 전체를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천사들의 병거는 "밤하늘의 여행"에 나오는 무함마드가 타고 다녔던 부라끄(Buraq)라는 짐승이다.
2. 후리스(Huris)가 있는, 이슬람의 천국
꾸란의 55장은 라흐만(Rahman, 은혜로운) 장이라고 부른다. 라흐만 장은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의하면 "모든 것에 진수가 있나니 꾸란의 진수는 라흐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꾸란은 전체 114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수가 55장이다. 이 장에서는 천국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여성에 대한 묘사가 많다. 꾸란에서는 천국에 오는 남자들을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여성을 후리스(Huris)라고 부른다. 그런데 후리스는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에서 온 개념이다.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천국에서 사는 여성을 후리스라고 불렀다. 그녀들은 무척 아름다워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천국의 배우자를 칭하는 후르(Hur)라는 단어는 꾸란에 나타나 있는데, "검은 눈"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페르시아에서 왔다. 페르시아에서 3세기부터 사용된 언어가 팔라비(Pahlavi)어인데, 팔라비어로 후르(Hur), 현재 페르시아어로는 쿠르(Khur)라고 한다. 이는 원래 "빛", "밝음", "햇빛", 그리고 "태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인들에게서 "밝음"과 "햇빛과 연관된 처녀들"에 대한 개념을 빌려 올 때, 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른 것으로 보인다.
▲7세기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오만의 무스카트 무트라(Muscat Muttrah) 해안의 성. ⓒFIM국제선교회 제공 |
3. 죽은 자들의 다리
이슬람 전통에서 아스 시라트(As Sirat, 지옥의 다리) 또는 시라트 알 자힘(Sirat al-Jahim)은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다리로서, 지옥 위에 놓여 있다. 이 다리는 심판의 날에 땅과 천국을 이어 주는 유일한 길이며, 모든 사람들은 이를 건너야 한다. 꾸란 1장 7절에 의하면 '올바른 길'을 아랍어로 "슈라틀 무스타김"(As Suratul Mustaqim)이라고 한다. 슈라트(Surat)라는 단어는 아랍어가 아니고 페르시아어로서, 친바트(Chinvat)를 아랍어로 쓴 것인데 Ch를 나타내는 글자가 아랍어에 없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여 (S)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시라트(Sirat, 다리)의 첫 자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에서는 친바트 다리(Chinvat Peretum)로 나온다. 이 다리는 선행과 악행을 합산한, 지옥 위로 뻗어있는 다리다. 각 사람의 영혼은 장례가 끝나자마자 이 다리 위에 도달하게 되며, 천국을 가기 위하여 이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넌 후에는 미트라(Mithra), 라슈누(Rashnu), 스라오샤(Sraosha)에게 자신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 그의 선행이 악행보다 많으면 천국의 문이 열릴 것이고, 악행이 더 많다면 그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선행과 악행이 똑같다면 그는 최후 심판의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와 같이 이슬람의 '죽음의 다리' 개념은 조로아스터교에서 영향을 받았다.
4. 페르시아에서 빌려 온 다른 개념들
이슬람의 전통에 따르면 한 명의 선지자는 자신이 죽기 전에 다음에 올 선지자에 대해 예언한다. 성경에서는 단지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만 예언되어 있기에, 이런 전통을 찾을 수 없다. 이 개념은 다사티르 아스마니(Dasatir-i-Asmani)라는, 조로아스터교의 문헌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문헌은 페르시아의 고대 다리(Dari)어로 번역된 것이 18세기에 발견되었다. 이 내용은 봄베이의 뮬라 피르즈(Mulla Firuz)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이 문헌은 15개의 논평을 담고 있는데, 열 다섯 명의 연속된 선지자를 예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 선지자는 마하바드(Mahabad), 마지막 선지자는 사산(Sasan)이었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Sasanian)는 사산을 자신들의 가문 인물이라고 여겼다. 이 다리어 번역은 A.D. 590년에서 59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기에, 원본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것이다. 각 논평의 결론은 다음에 올 선지자를 예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슬람은 자신들의 믿음 체계에 이것을 끼워 넣었다.
무함마드 시대에 페르시아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로 인하여 꾸란 속에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의 개념이 있는 것이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 가운데 살만(Shlman)이라는 페르시아인이 있었다. 그는 능력이 있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의 경험과 군사적 조언을 통하여 무함마드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쿠라이쉬 부족과 전투를 벌이던 A.D. 627년 2월에 참호를 파서 메디나를 방어했는데, 참호를 파고 요새를 만드는 전투 방법은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최초였다. 이것은 페르시아의 전술에서 나온 것이다. 무함마드는 또한 타이프(Taif)를 공격할 때(A.D. 630년) 살만을 통해서 투석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따라서 무함마드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꾸란을 집필할 때 도움을 주었다는 사람을 바로 살만으로 본다. "한 인간이 그(무함마드)를 가르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들을 우리(알라)는 알고 있나니 그들은 외래인이 그(무함마드)를 가르친 것이라 하더라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아랍어이라"(꾸란 16:103). 무함마드를 따르는 무리 중에는 분명히 꾸란에 삽입된 내용을 가르쳐 주었다고 추정되는 페르시아인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을 때 페르시아의 전설이나 전통들이 아라비아 반도에 잘 알려진 상태였으며,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해석 선교사
총신대학교(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equiv.)을 졸업하고, 영국 웨일스대학교 신학/이슬람학부에서 철학석사(M.Phil.)학위를 받았다. 또한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Ph.D) 과정을 수학했다. GMS 파송 선교사로 오엠선교회와 협력하여 이집트에서 사역하였으며, 현재 FIM국제선교회 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생명의말씀사)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