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열린 '평양지역 감리교 역사와 한국교회' 학술 심포지움.  ©이동윤 기자

2014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 심포지움이 '평양지역 감리교 역사와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로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렸다. 심포지움은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남산교회·성화교회·시온교회가 주최했고, 한국기독교역사학회가 주관했다.

이날 심포지움에서 고성은 박사는 '성화신학교의 역사와 성화파의 활동'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그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북한 지역에서 1946년 6월 북한 지역 감리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산고 끝에 출산했다. 바로 '성화(聖化)'라 이름한 신학교였다"면서 "평양에 설립한 성화신학교는 북한 사회주의 정권을 통한 수난 속에서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횟수로는 5년만인 1950년 2월 평양신학교와의 '강제합병'이 계기가 돼 폐교된 단명한 신학교였다"고 말했다.

고 박사는 "(하지만) 성화신학교가 한국 감리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실로 적지 않다"며 한국교회사에 남긴 성화신학교의 발자취를 조명했다.

고 박사는 이날 남북 분단 중 평양에 신설했던 성화신학교가 사회주의 정권에 들어선 북한 지역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또 한국전쟁을 계기로 월남한 성화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 즉 성화인들이 남한 교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전했다.

▲학술 심포지움 참석자들의 모습.  ©이동윤 기자

고 박사는 성화신학교의 설립 배경에 대해, 북한 감리교회 지도자들이 3.8선의 고착화를 직감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는 "감리교 지도자들이 분단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3.8선 이남인 서울에 위치한 감리교신학교를 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자구책의 일환으로 성화신학교가 태동했다"고 전했다.

또 성화신학교 설립 배경으로 북한 지역 목회자들의 월남과 관련한 '선한 목자, 삯꾼 목자'이라는 논쟁도 큰 이유가 됐다. 당시 목회자들 가운데는 적잖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속이고 월남 대열에 적잖게 합류했고, 이로 인해 북한에 남아 있던 성도들은 이들을 '선한 목자'가 아니라 '삯꾼 목자'라고 비방했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며, 성화신학교 설립을 주도한 흥해 배덕영은 최종적으로 월남 대신에 북한 잔류를 선택했다. 이에 대해 고 박사는 "북한에 남기로 결심한 '그의 선택'에는 분명히 '순교신앙'도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배덕영은 흔들림 없이 잔류를 선택하며, 북한 지역에서의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 설립을 모색했다. 고 박사는 "성화신학교는 월남을 거부하고 북한에 잔류하기로 결심한 자들의 손에 의해 설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화신학교는 설립한 직후, 북한교회와 북한정권 사이에 전국적이고 대규모적인 갈등과 마찰이 발생하는 등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계속 맞닥뜨리게 된다.

고 박사는 "배덕영은 해방 공간 속에서 관제 주도의 북한교회 연합체로 북한교회를 강제 장악한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해 활동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성화신학교를 지키려는 우회적 노력의 일환으로 추측된다"고 당시 험난했던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다.

북한 사회주의 정권 아래에서, 성화신학교의 본격적인 수난은 설립 6개월만에 교장인 배덕영의 납치로부터 시작됐다. 배덕영은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납치 연행을 당한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성화신학교 역사와 회고'라는 책에 의하면 그의 비석은 아내인 임순회 사모가 묻힌 경기도 고양시 사루현리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고 박사는 "배덕영이 없는 성화신학교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며 "그런 중 북조선인민공화국 교육성에서는 평양신학교 이성휘 교장에게 합병 서명을 받은 직후, 교장 대리역할을 하고 있던 박대선을 교육성으로 불러 평양신학교와의 합병을 끈질기게 요구했다"고 전했다.

배덕영 교장을 납치하고 박대선 교장 직무대리를 불러 합병을 통보한 이후, 북한 사회주의 정권은 성화신학교에 대해 일사분란한 교살 작전을 본격화했다. 결국 북한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평양신학교와 성화신학교는 끈질긴 탄압 끝에 '강제합병'을 하게 됐다.

고 박사는 "성화신학교가 강제합병과 함께 폐교하게 된 것은, 당시 북한 정권이 성화신학교에 대해 '반공 신학교'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화신학교에 재학했던 신학생들은 '신앙과 주의(이데올로기)'를 구별하지 않고 혼동해 '반공이 곧 신앙이고, 신앙이 곧 반공'이라는 인식을 가진 학생들이 많았고, 이러한 이유들이 당시 북한 정권을 자극했다는 것.

고 박사는 "성화신학교는 북한 지역 감리교회 교역자 양성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라는 단서조항을 지닌 잠정적인 교파 신학교로 세워졌다"며 "하지만 성화신학교는 단순한 교파 신학교로 존립한 것이 아니라 교파를 초월한 신학교로 존립했으며, 교파를 초월해 몰려든 반공 기독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고 박사는 "성화신학교의 수난을 돌아보면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결코 양립할 수 없었던 시대상이 존재했고, 결국 성화신학교는 북한 사회주의 정권에 탄압을 당하며 5년간 존립했던 단명한 신학교가 되고 말았다"고 전했다.

성화신학교가 폐교된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이 결정적 계기가 돼, 월남을 선택한 성화신학교 학생과 교수들이 적지 않았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월남한 성화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의 결속력은 대단했다. 동문회를 조직하고 군대도 같이 입대하고 교회도 설립했다. 또 성화신학교 본과 1회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성화신학교 교수들과 연대해 한국 감리교회 내에서 정치 서클을 형성하기도 했다. 곧 성화신학교의 이름을 차용한 '성화파'이다.

고 박사는 "당시 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장로교회를 비롯한 다양한 교파에서 몰려들어 성화신학교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인격을 도야해 신앙훈련을 받았던 성화인들은 성화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를 비롯한 다양한 교파에서 자리하며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성화의 빛'을 발하는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 박사는 "이로 미뤄 볼 때, 평양요한학교 교장인 이환신이 일제 말기 설립돼 단명한 평양요한학교에 대해 '위대한 학교'라고 자평한 바 있지만, 해방 후 남북 분단 속에서 새롭게 설립돼 단명한 성화신학교는 '더 위대한' 선지 학교로써 평가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고 강조했다.

고성은 박사의 발제와 함께, 유관지 원장(북한교회연구원)은 '평양지역 감리교 역사와 한국교회'에 대해 기조강연을 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평양 남산현교회의 역사'에 대해, 조이제 목사는(여주소망교회)는 '해방 후 평양 감리교인의 월남과 교회재건'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이후 이원재 목사(남산교회), 임재식 목사(시온교회), 김병태 목사(성화교회), 이계준 교수(연세대 명예)는 종합토론 및 총평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