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안식일 지킴은 계속될 것이다. 유대인이 안식일을 포기하는 것은 곧 자신의 유대인임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대를 따라 안식일의 규정은 새롭게 해석되었고 적용되었다. 과학의 발전으로 새로운 생활 도구들이 발명되면, 유대 랍비들은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데 방해가 되는지를 해석하였고, 안식일에 사용 여부를 결정하였다.
예를 들면, 냉장고의 문을 열면 냉장고 안의 작은 전등은 자동으로 켜진다. 냉장고의 문을 여는 것과 냉장고 안의 작은 전구가 켜지는 것은 별개의 행동임에도, 안식일에 냉장고의 문을 열 경우 의도하지 않았어도 안식일을 범하게 된다고 판단하여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냉장고 안의 작은 전구를 빼 놓는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토요일 하루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식일은 유대 민족의 정신이며, 유대 문화의 핵심이다. 안식일을 제외시킨 채 유대 민족을 말할 수는 없다. 주일에 대해서는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어도 안식일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방대한 자료들이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잘 지킨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유대인들은 성경의 교훈을 따라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다. 현대 유대인들의 안식일 지킴은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초한 잘못된 전통에 따른 안식일 지킴이다. 오늘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요한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환자를 치유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 불쌍한 사람을 보시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곧 나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이 사건은 표면적인 안식일 규정에 매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두 가지 걸림이 되었다.
첫 번째는 ‘병자가 안식일에 돗자리를 들고 갔다’는 것과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료 행위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 모두 예수님과 관련되었음을 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예수를 박해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요 5:16).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안식일에 대한 매우 중요한 규정을 읽을 수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요 5:17).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라.”
먼저 유대인들의 안식일 핵심 규정에 대해서 다시 본다. 출애굽기 20:8-11절에 기록되기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의 핵심 규정 가운데 하나는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이다. ‘일’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믈라하(hk'al'm.)는 영어의 work, labor와 충분히 일치하는 단어가 아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히브리어 믈라하(hk'al'm.)의 의미만을 다루겠지만, 어떤 일이 되었건 십계명의 한 계명은 ‘일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다.
‘일하지 말라’는 이 규정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기본 원칙이 되어 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예수님 당시에도, 지금도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정은 바로 이 기본 원칙에 충실(?)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간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을 치유 하셨는데, 그 ‘치료하는 일’을 문제로 삼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 하셨다. 곧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하나님,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메시아), 안식일에 일해야 한다는 안식일의 새로운 해석을 더하셨다.
유대인들이 전통에서 벗어나 안식일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바로 이 ‘안식일에도 일해야 한다’는 안식일 재해석에 주목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정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일하지 말라는 것과 일해야 한다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 이것은 기존 안식일 이해를 갖고 있던 유대인들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돌에 맞아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안식일의 핵심 의미가 아닌 그림자에 해당된다. 안식일의 핵심 의미는 엿새 동안 일하되 일곱째 날은 엿새 동안 일하던 것으로부터 자유함에 있다. 매인 것으로부터 놓임 (자유함), 바로의 노예 되었다가 해방됨 (신 5:15), 속박된 것으로부터 구속,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영원한 생명, 이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이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간 병에 매어 있던 자를 ‘자유하게 하는 일’을 하셨고, 그로 하여금 ‘병으로부터 놓임을 받게 하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 이같이 ‘매인 것으로부터 놓이게 하는 일’은 안식일에도 ‘일해야 하는 안식일’의 진정한 모습이다.
마태복음 12장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다. ‘안식일에도 일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은 안식일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을 더하셨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안식일에 매인 자를 풀지 않겠으며 안식일에 갇힌 자를 자유하게 하지 않겠느냐?”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유대 조상들의 엄한 교훈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누구도 바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할 수 없다. 뉴욕의 유대인 구역에 거주하는 한 유대 종교인이 어느 날 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내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겠다’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전통은 그들에게 혼과 같다.
그런데 현대 유대 종교인들보다 더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사건이다. 그런 바울이 안식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 .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5-9).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안 이후에 바울은 진정 유대인의 잘못된 전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데 실패하였다. 다만 그들은 안식일의 그림자적 의미만을 이해하였고 그것을 발전시킨 전통에 따른 안식일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여전히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일하지 않는 날’로만 지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을 일하지 않는 날에서 발전하여 ‘복음을 듣지 못하여 소망 없는 것으로부터 푸는 일’, ‘죄와 사망에 매인 자들을 자유케 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너희가 주일이라 하여 . . . 풀지 않겠느냐?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일이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일 (work, labor)이 아님은 분명하다. 먹고 마시는 일에 필요한 노동은 6일의 수고로 충분하다. 최소한 한 날은 속박된 자를 푸는 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란 날에 매어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란 날에 매어 있지 않다. 우리가 이 날을 예배일로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일마다 이 산 소망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회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