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선교활동이 다시 한번 구설수에 올랐다. 인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인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 에서 소위 ‘땅밟기’라는 명목으로 일단의 청년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의 동영상이 공개되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선교방식이 논란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내에서는 2003년 동화사, 2010년 봉은사에서 기독교식 예배와 찬송가를 불러 물의를 일으켰고, 국제적으로는 이슬람, 불교 문화권의 종교 성지에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일들이 개인적으로는 일회적인 종교적 무용담으로 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이런 선교는 종교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 문제, 국제적인 분쟁으로 확산 될 가능성이 크다는데 문제가 있다. 2007년의 아프칸 선교사 피랍 및 살해 사건은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 선교는 어떤 것이며 왜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생기는 것일까? 먼저, 선교는 기독교의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바로 선교 공동체이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 없는 교회는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문제는 선교를 보는 관점이 문제이다.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선교를 힘의 대결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타 종교와 충돌하여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십자군 전쟁이 아니라는 말이다.
과거, 라틴 아메리카 등 서구의 식민지 개척 당시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선교는 복음을 받아들여 회심과 삶의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만드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영적인 정복에 불과했다. 폭력과 공포, 강요에 의한 개종은 결국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고, 변화와 헌신의 삶이 아닌 전통 종교를 대치하는 새로운 기복종교로서의 역할로 그치게 되었다.
선교는 대결도 아니고 정복도 아니다. 선교는 사랑이다.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로마가 십자가 복음 앞에 무릎 꿇은 것은 힘의 대결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고 협박하여도 되돌아 오는 것은 사랑과 희생이었다. 로마 제국은 힘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는 있었지만 기독교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 사랑을 인정하고, 동화되고 변화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을 변화시킨 기독교 선교의 핵심이다.
만약 복음 전파가 힘의 대결로 세상을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정복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여 세상을 정복하는 방법 대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희생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구세주가 가신 그 모습, 그 길 그대로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 시켰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여전히 영적인 영역이며 영적인 싸움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정복이 아니라 끊임 없는 사랑의 표현, 목숨까지도 내어 주는 희생 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선교는 상대방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으로, 영으로 전해지도록 전도자가 먼저, 그리고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다. 사랑은 공감과 교통이다. 주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일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척결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있는 인정하고, 연약한 인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타인이든, 타 종교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 이제는 스토킹 선교가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으로 선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