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선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가나 전에서 참패를 당한 후에 손흥민 선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월드컵을 앞둔 마지막 평가전인 가나 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0-4. 너무나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대패였다. 더구나 본선 경기를 앞둔 마지막 평가전이기에, 실망을 넘어 절망을 안겨다 주었다. 호텔로 향하는 태극전사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불쌍하리만큼. 처절하게.
그러나 이영표 해설위원은 고집스레 말했다. "선수들에게 희망을 말해 주어야 한다"고. 너무나 실망스러운 평가전이었다. 그렇다고 태극전사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온 국민의 응원을 등에 지고 있기에. 더구나 세월호 참사로 인한 아픔과 슬픔이 너무 크기에. 그래서 한반도 땅에 뭔가를 불어넣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를 악물어야 했다.
실전을 이틀 앞둔 연습장에서 손흥민 선수가 말했다. "이번 패배는 좋은 예방접종이었다. 평가전 결과는 빨리 잊겠다. 본선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이게 무슨 큰소리? 스스로를 변명하려는 건가? 허세를 부리는 건가?
2002년, 2014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평가전을 통해 익숙한 표현 하나가 있다. '오대영과 사대영' 히딩크와 홍명보 감독에게 붙은, 불명예스러운 별명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은 대한축구협회에 주문을 하나 했다고 한다. "평가전 상대로 강팀을 알아봐 달라!" 히딩크 감독의 고집으로 강팀들을 상대로 평가전을 치렀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 프랑스에 0대 5. 체코에 0대 5. 연이은 대참패. 사람들은 히딩크 감독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주었다. '오대영'. 그러나 결과는 어땠는가? 히딩크 호는 4강 신화를 썼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출범하는 홍명보 감독에게도 '사대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멕시코와의 평가전에서 0대 4. 가나와의 평가전 역시 0대 4. '영원한 리베로'라는 애칭이 무색하리만치 실추되었다.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선을 앞둔 마지막 평가전에서 이런 결과를 낳았으니. 실망 그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마음을 정했다. "결과보다 월드컵 자체를 즐기자!" 기대가 크다 보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아예 기대를 내려놓자는 것이다. 낮은 기대 속에서 출발하면 실망도 덜 커질 거니까.
한국 전을 앞둔 러시아의 사기는 대단했다. 홍명보호를 무너뜨릴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다는 투였다. 러시아 대표팀 주장은 주저하지 않고 호언장담했다. "나는 100% 준비가 됐다. 한국을 이길 준비는 끝났다"
러시아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홍명보호보다 한 수 앞서는 게 사실이다. 그들은 한국을 1승 제물로 생각하고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시종일관 무시해 왔다.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어쩌면 그게 전략일지도 모르지만. 러시아 대표팀 감독 역시 공식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깔봤다. "굳이 한국 선수들의 이름까지 알 필요가 없다."
우리로서는 울분이 터지는 발언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들이 한국을 그렇게 보고 있으니. 아니 몇 차례의 실망스러운 평가전을 볼 때 할 말도 없지 않은가?
러시아 대표팀은 조직력에선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미드필더 라인의 강한 압박과 빠른 패싱 능력은 최대 강점으로 꼽혔다. 그들은 마지막 훈련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스파르타 훈련에 임했다.
러시아와의 결전을 앞둔 홍명보 감독은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믿는 건 여기 있는 선수들이다." 기자가 홍 감독에게 물었다.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꼭 이겨야 16강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홍 감독은 대답했다. "지지 않는 경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양측 감독의 경력은 현격하게 대조적이다. 러시아 축구 대표팀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세계적인 명문구단을 이끈, 자타가 공인하는 백전노장의 명장이다. 월드컵 참가국 32개국 가운데 연봉 1위일 정도로. 그러나 홍명보 감독은 연봉 23위. 초짜 감독. 더구나 전문가들 역시 한국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한국은 러시아를 맞아 예선 첫 경기에서 선전했다. 조직력도, 투지도 살아 있었다. 주목할 선수가 없는 것 같다고 하던 한국팀에는 반드시 주목해야 할 선수들이 눈에 띄었다. 한국은 먼저 선취점을 올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문을 지키지 못하고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고 말았다. 1대1 무승부로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지만, 기대 이상의 훌륭한 경기였다.
의외의 경기를 관전한 외신들은 평가한다. "(한국 축구팀의 평가전 부진은) 월드컵을 향한 정교한 계략 중 일부에 불과했다"
앞으로 치러야 할 벨기에와의 경기 역시 만만치 않다. 아니 러시아 전보다 더 힘들 게다. 그러나 러시아 전처럼 그렇게만 싸워주길 기대한다. 이를 악물고. 세월호 참사로 무너진 국민들의 마음에 희망을 불어넣을 심정으로. 하나로 똘똘 뭉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온 국민들도 약속하리라. 길거리 응원의 힘찬 격려와 박수를 다시 한 번 보내리라고.
부진한 평가전으로 주눅들어 있던 대표선수들은 러시아 전에서 선전하면서 이제 자신감을 얻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미치도록 즐기고, 미치도록 이기고 싶다." 한국 대표선수들의 공식 슬로건은 '즐겨라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자기 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정말 무섭다.
인생의 뒤안길을 뒤돌아본다. 상대방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남보다 좀 더 강하다고, 잘났다고, 조금 더 안다고 함부로 큰소리 치지 않았는지.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데. 얕보았던 사람들에게서 의외의 저력이 나올 수도 있는데. 다시는 함부로 큰소리치지 않으리. 함부로 남을 얕보지 않으리. 그게 관계 영성이 아닐까?
자신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겠다. 보잘것없는 자신에게도 숨겨진 힘이 있을 수 있으니까. 조금 못났으면 어떤가? 나에게도 나름의 매력이 있으면 되지. 실력이 좀 딸리면 어떤가? 그 대신 다른 사람과 협업을 잘 하면 되지.
실력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승부는 반드시 실력과 정비례하는 것만은 아님도 잊지 말아야겠다. 이미 축구의 종주국 잉글랜드, 세계 1위 스페인이 16강 탈락이 확정되었다. 충격이다. 그러니 알량한 실력 믿고 거들먹거리지 말아야 한다.
다윗 역시 비교도 안 되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 앞에서 당당했다. 왜?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절대 신뢰하니까. 내 모습을 보면서 골리앗과 같은 세상 앞에서 주눅 들지 않으리라. 나를 돕는 주님이 곁에 계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