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시간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갑작스러운 질병과 사고가 닥칠 때 육체적·정신적 심각한 위기를 느낀다. 인간이면 반드시 겪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 가운데, 죽음은 현세의 삶의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인간의 한계점이다.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왕이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는 신하들에게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이 회복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령했다. 그는 죽음의 위기를 느끼며 정말 자신이 회복될 수 있는지 불안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처럼, 아버지 아합왕과 같이 아하시야왕은 생명의 신 하나님을 찾지 않고, 파리의 신이자 재앙을 다스리는 신이라 믿던 우상에게 의지하는, 결정적 불신앙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왕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에 엘리야 선지자를 만났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가느냐?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왕하 1:3-4)고 전했다. 아하시야는 자신에게 그렇게 예언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여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으니, 그들이 "그는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다"고 하였다. 아하시야는 바로 그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라는 것을 알았다.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잡고자 하여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 타서 죽었다. 다시 왕은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보냈다. 그러자 또 엘리야의 한 마디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타서 죽었다. 또 다시 왕은 오십부장과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 보냈다. 그 오십부장은 엘리야에게 생명을 귀하게 여겨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가라고 하여, 그는 왕을 만나 경고하였다. 결국 아하시야는 병으로 죽었다.
왕은 보통 사람들처럼 병으로 죽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Ross)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몇 단계의 감정을 거친다고 한다. 이 단계들은 부인, 흥정, 분노, 우울, 인정 등이다. 어떤 사람은 한 단계에 머물러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여러 감정의 단계를 한꺼번에 혹은 왔다갔다하기도 한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이러한 감정들로 인하여 혼란과 불안을 가중시킨다.
아하시야는 사망선고를 받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는 죽지 않으려고 우상을 찾았으며, 분노하여 엘리야를 잡아들이고자 하였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상실감에 젖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찾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다. 아마 그는 부인, 흥정, 분노, 우울 사이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 우울에 빠질 수가 있다.
종종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는 기독교인들이 평안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발견한다. 필자는 사역을 할 때에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암 말기 환자라 예배에 나올 수 없는 한 분을 한 달에 한 번씩 심방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심방하면서 슬픔의 과정을 함께했다. 그분은 네 자녀의 어머니로, 왕년에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던 멋진 여인이었다. 그분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지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단계를 봐야만 했다. 찬송을 좋아했던 그분은 많은 사람의 찬송을 들으면서 돌아가셨다. 기독교인에게 죽음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