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1-3의 말씀입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의 사사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이렇게 한 번 쓰임받고 끝난 인생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입다에 대하여 수준 미달의 사사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입다는 자신의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입다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당나귀의 입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당나귀가 입을 열어 말했다고 해서 당나귀가 위대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대단하게 여기고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라고 믿으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을 맹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잠시 동안 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설교자의 입술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은혜의 말씀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셨다고 해서 입다가 위대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싸움에서 하나님께 쓰임받았지만, 그래서 그가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은 한 마디로 비극이었습니다. 입다의 가정은 그의 잘못된 서원으로 말미암아 딸을 재물로 바쳤야 했습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같은 민족인 에브라임 지파와의 갈등으로 에브라임 지파 사람을 무려 4만2천 명이나 죽였습니다. 입다는 외적으로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지도자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실패한 가장이었고 에브라임 지파를 품지 못한 긍휼이 없는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외부적으로는 성공한 지도자로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오히려 가정과 공동체에 아픔을 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부부 사이가 깨어지고 자녀들은 상처받으면서 아파하고 있어도, 남들 보기에는 얼마든지 성공한 사람 같이 보일 수 있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입다는 기생이 낳은 사생아였습니다. 아마도 매춘에 의해서 태어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생아는 하나님의 성회에 참여할 수가 없고 재산도 물려받지 못합니다. 사생아인 입다는 이복 형제들에 의해서 집에서 쫒겨났습니다. 이것이 입다에게 충분히 상처와 아픔이 되었을 것입니다. 입다는 잡류라고 표현되는 건달패들과 어울렸습니다.
입다는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한 번 쓰임받고 끝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상처가 있고 문제 있는 사람도 치유하셔서 쓰실 수가 있습니다. 상처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입다의 문제는 상처가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그의 가정과 그의 삶에 비극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입다의 또 하나의 문제는 치유받지 못한 상처로 인한 야망입니다. 무시당하고 인정받지 못한 어린 시절을 치유받지 못한 입다는, 성공하려는 야망과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한 성공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도 권력에 집착하고 돈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그가 가진 치유받지 못한 상처 때문입니다.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입다 사사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4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만 순종해야 합니다. 사사기 11장 29~3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입다는 자신이 승리할 경우에 자기 집 문에서 나와서 자기를 영접하는 자를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서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서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만 순종하면 됩니다. 그 이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어떠한 번제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던 것처럼 입다에게 명령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어떠한 서원도 열심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입다는 자기의 열심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서원을 통해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것입니다. 이기게 해 주시면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말 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사람을 번제로 드릴테니 이기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거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싸우시는데 자기가 싸우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싸우고 있는 나를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사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하고, 서원을 함으로써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이라고 말하는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사역입니다. 나의 노력과 열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드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서원하고 그리고 무언가를 드려서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요즘 사람들의 간증을 듣다 보면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가만히 들어 보면 자기의 열심과 헌신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랑이 아니라 나의 자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몸을 희생하면서, 바쁘게 일해서 성공해서 드리는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욕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래를 통해 하나님을 조종해서 나의 성공을 보장받고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나의 상처로 인한 야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힘써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분 앞에, 그분의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주하게 주의 일에 뛰어다니고 노력하지만 늘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나의 의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헌신과 노력 없이도, 심지어 내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회의 50%는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고 어느 분이 말씀하셨는데, 참으로 공감이 됩니다. 단기간에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고 어떠한 일의 성취를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무리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암몬 족속과 싸우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신앙은 내가 가진 것을 드리겠다고 서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족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입다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지식으로 인해, 그리고 자신의 잘못된 야망으로 인해 사람들과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번제로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금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고 사람의 생명에 대한 존중함도 없었습니다.
입다는 처음부터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바치겠다고 서원했는데 결국 그는 하나님께 한 자신의 서원을 취소하지 못하고 자신의 딸을 번제로 드립니다. 어떤 분은 입다는 자신의 딸까지도 하나님께 바친, 믿음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는 절대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치유받지 못한, 야망에 사로잡힌, 무지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야먕을 위해 주변의 사람들과 가족을 희생시킨 사람입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거절 당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그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기 위해 야망에 사로잡힐 경향이 큽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해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입다는 딸 뿐만 아니라 자신을 대적하는 에브라임 지파 4만 명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거절감을 치유받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입다의 문제는 처음부터 잘못된 서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5:2은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말을 적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잘못된 서원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자신의 서원이 성경에 비춰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서원을 파기해야 합니다.
사람을 번제로 바치는 것을 금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딸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사람의 서원이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서원하였기에 반드시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입다의 서원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을 번제로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서원을 파기함으로 자신이 얻은 자리를 내려 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어찌보면 그는 자신의 딸과 가족보다 자신의 자리와 명예가 더 중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죄를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이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에 망합니다. 회개할 때에만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회복이 있습니다. 입다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된 서원에 대한 회개였습니다.
1억짜리 집에서 사는 여자 집사님이 부흥회에 참석해서, 부흥사의 설교에 흥분하여 남편과 상의도 없이 5억을 건축 헌금으로 작정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서원자는 집을 팔고 빚을 얻어서라도 헌금을 해야 할까요? 자기의 경솔함, 남편과 상의도 없이 한 작정한 성급함과, 자신의 형편을 돌아보지 않고 헌금을 무리하게 약속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원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중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독신서원을 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을 통해 성경을 읽고 자신들의 서원이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고 서원을 파기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마르틴 루터입니다.
자신의 일과 성공을 위해서 사람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나의 상처난 영혼과 그 속에 있는 나의 야망을 봐야 합니다.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그리고 함께 한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자리와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신도들에게 무리한 헌신과 헌금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부부를 이혼시키고 학생들을 가출시키면서 가정까지 깨고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가족과 자녀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번제로 바치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합니다. 입다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들이었습니다. 상처가 많았기에 딸에 대한 애정이 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의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딸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이요, 치유받지 못한 상처로 인한 야망 때문입니다.
입다가 언제 이런 서원을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한 직후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이 임한다고 해서 우리가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갑자기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어떠한 체험을 한 후에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줄 아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성령 체험을 하고 난 후에 자기 절제를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분주하게 간증하고 사역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때부터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삶이 꾸준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고 내 안에 있는 야망과 욕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세상의 방식으로 주님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입다는 사람을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의 종교에는 혼인한 부부의 다산을 빌기 위해 가나안의 어머니 신에게 처녀를 바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입다의 출신지인 길르앗에는 그모스 신을 섬겼는데 그들은 아이들을 재물로 바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살던 시대와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들이 섬기던 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정말 무서운 것은 세상을 따라가는 진리가 없는 교회입니다.
마케팅과 심리학이, 성공학 개론이 교회로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기업체가 아닙니다. 목사는 교회의 전문 경영인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회사는 일한 만큼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만큼 은혜로 주십니다.
세상은 돈이 최고입니다. 큰 건물, 많은 사람들, 명성이 힘이고 권력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반대입니다. 돈도 건물도 많은 사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일 위험한 사람이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엎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능력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감추어진 상처는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사기 12:1-6을 봅시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 나서지는 않다가 나중에 시비를 잘 거는 지파입니다. 기드온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들을 달랬습니다. 지도자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달래야 합니다. 끌어안아야 합니다.
사사기 8:1-3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 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입다는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입다는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상처를 받았고 그리고 자신의 딸까지 잃었습니다. 거절을 많이 받고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을 반대하고 도전하는 사람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은 사람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입다는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에브라임 지파를 4만명 넘게 죽였습니다. 상처는 나만의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까지 상처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대적하고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인다고 상처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아직도 치유받지 못한 상처로 인해 다른 사람과 다투는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왜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판적인지, 왜 늘 시각이 부정적인지, 왜 돈에 욕심이 많은지, 문제가 생기면 왜 큰 소리로 이길려고 하고 참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상처 때문입니다. 상처받은 나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와 상처들을 깨닫고 기도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내 안에 묶여 있는 것들을 풀어내야 합니다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임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만지심으로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그 상처는 반드시 결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승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열등감의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과에 집착합니다. 무리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얻으려고 합니다. 돈에 집착하고 돈에 목숨 거는 것도, 돈으로 인한 상처의 결과들입니다. 상처는 불신앙의 상태를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이 성공하려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목회자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돈과 건물에 목숨을 거는 목회를 하게 될 경향성이 큽니다. 치유받지 상처는 반드시 인격적·성품적 결함을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 본지는 현재 미국 세인트루이스 카버넌트신학교(Covenant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원베네딕트 선교사(유스미션 대표)의 글을 [원베네딕트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비정기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