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어디서 왔을까?
성경적 관점에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추적한다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은 온 인류의 구체적 행로를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작업이 가능할까? 한 가지 실마리는 있다. 성경은 인류의 모든 족속은 한 혈통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행 17:26). 즉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홍수(창 7-8장) 이후 노아의 후손에서 파생된 족속들을 열거하고 있다. 셈에서 26개 족속, 함에서 30개 족속, 야벳에서 14개 족속, 도합 70개 족속이 이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노아의 아들인 이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족속과 방언(方言)과 지방과 나라가 나뉘었으니,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列國) 백성이 나왔다고 했다(창 10: 31-32). 성경은 물론 단순한 역사서는 아니다. 계시와 신앙의 경전이다. 성경 구약 창세기는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과 희랍 정교 그리고 개신교 세계관의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계시 종교인 이들 종교들의 출발점으로서의 창조 신앙의 근간은 창세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창조 신앙은 역사적으로도 진리라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성경적으로 우리 민족을 추적하는 난제들
인류의 분산을 성경만으로 설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성경이 계시의 종교요 창조 신앙을 전제하나 성경의 관심은 단순한 인류 역사를 넘어 인류 구속사(救贖史)의 여정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인류의 분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후 더는 구체적인 인류 계보에 대해 추적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인류 계보를 추적하는 데 있어 간혹 성경과 기존 세속 과학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구속사(救贖史)적 관점에서도 족보는 중요하다. 성경은 생명책이라는 구속사적 영적 족보를 제시한다. 즉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육적 족보로 시작하여 영적 족보(계 21: 27)로 끝나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창조 신앙과 구속 신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성경적 진실 안에서 창조 신앙과 구속 신앙은 늘 공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추적하는 작업도 이와 같이 성경이 정확무오한 진리라는 복음주의적 전제 아래서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성경은 물론 세계 모든 인류의 종족과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오직 유일한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주류(主流)는 과연 어디로부터 왔을까? 반도(半島) 국가이니 당연히 바다 아니면 내륙에서 왔을 것이다. 내륙은 작금의 중국 땅 요동 반도와 산동 반도 그리고 만주 지역을 말하고 바다는 동남아 지역과 한반도에 인접한 기타 중국 땅을 말한다. 당연히 이들 지역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이를 크게 남방계와 북방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특별한 경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일부 한반도로 다시 역 이민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묻고 싶은 질문은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니다. 고대 우리 민족의 주류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것이다. 세속 고고학은 이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연구 결과들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연구 성과들이 성경적 결론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 문제를 추적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난제들을 만들어낸다. 그와 같은 난제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성경과 우리 민족을 연결하는 신앙적 다리를 놓는 초석이 되는 기초 작업은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초기 역사
고고학은 달리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 인류를 연구하기 위해 탄생한 학문이다. 덴마크의 톰젠(C. J. Thomsen)은 인류 역사를 사용 도구의 재질에 따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의 3시대 체계(three age system)로 나누었다. 석기시대는 다시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쓰던 구석기시대와 마제석기(磨製石器)를 쓰던 신석기시대로 구분한다. 1909년 프랑스 고고학자 모르강(J. D. Morgan, 1857-1924)은 구석기와 신석기 사이에 중석기시대(Mesolithic Period)를 넣기도 했다. 이들 시대 구분이 세계 각 지역의 문화 발전에 어떤 시대에 이루어졌는지는 또 다른 난제이다. 모두 제대로 된 기록문서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의 구분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학적 시대 추적에 있어 이 같은 구분법은 일차적인 시대상을 찾아내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 고고학도 일부 이들 시대 구분법을 활용하고 있다. 한국의 고고학은 우리 한반도에 인류가 들어와 생활한 시기를 보통 구석기시대 - (중석기시대) -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초기 철기시대 -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 통일신라시대(남북조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등으로 구분한다. 이 가운데 역사시대 이전의 구석기고고학 복원에는 1964년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한 손보기 박사(전 연세대 교수)와 그의 제자로 공주 석장리를 비롯하여 청원 두루봉, 단양 수양개(국가 사적 398호), 중원 구석기 유적 등 수많은 구석기 유적을 발굴한 이융조 박사(전 충북대 교수)의 공헌이 크다. 1974년 개편된 국사교과서에 국내 구석기 유적이 실리게 된 것도 바로 이들의 공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가 조작한 교묘한 식민사관으로 인해 한반도에는 구석기 유적이 없다는 자학적 판단이 소멸되게 된 것이다. 오히려 구석기 유적을 조작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 자신이었다. 일본 제1의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가 미야기(宮城) 등에서 발굴한 구석기 유적 61점은 모두 조작된 것들이었다.
구석기 시대 수렵(狩獵)과 농경을 하며 씨족과 부족을 이루어 살던 우리 민족의 원류는 소규모 부족국가(혹은 성읍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천관우(千寬宇)는 이들 부족국가보다 성읍(城邑)국가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성읍국가는 도시국가라는 개념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전개 과정을 씨족사회, 성읍국가, 영역국가, 대제국으로 전개된다고 보는 도식이다. 이것은 미야자키(宮崎市定)가 고대사회 전개과정을 세계사적 보편원리에 따라 중국역사를 씨족사회, 도시국가, 영토국가, 대제국이라는 도식에 적용시킨 데서 기인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한국사의 최초 국가 형태도 성읍국가가 될 것이다. 학문적으로 정통학자들은 성읍국가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데 비해 여기서는 일반적 용어인 부족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들 부족국가들은 만주 요동을 중심으로 고조선으로 발전하였고 일부는 한반도 전역에서 부족국가를 이루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조선이 서서히 와해되면서 고조선의 유민들은 수 차례에 걸쳐 한반도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포함된 우리 민족은 삼한을 포함한 한국적 춘추전국시대(이른바 고고학자 김원룡박사가 말한 원삼국시대)를 거쳐 다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연맹 등으로 재편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한민족 상고사 말살 정책
그 동안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는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조직적 민족 고대사 말살 정책에 따라 고조선 역사가 신화로 격하되었으며 심지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초기 역사조차 불신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한국 상고사 말살을 위해 조선반도사를 새로 편찬한다는 구실로 1910년 11월부터 다음 해 12월 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을 시도하여 총 51종 20여만 권을 수거하였다. 이를 기화로 시작된 조선사편수를 위한 모임은 사이토(齋藤 實) 총독을 중심으로 일본의 이마니시 류(今西 龍)와 한국의 이병도(李丙燾) 박사가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한국고대사가 식민사관으로 흐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이 같은 식민주의 사관은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제도권 사학계의 흐름을 이어온 감이 없지 않다. 국내 기독교계가 고조선과 단군의 역사에 대해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 온 것도 이 같은 선입견이 일부 작용하여 왔다고 본다.
비신화화의 필요성
어떤 민족이든 신화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신화는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반영한다. 즉 신화와 역사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대성(大姓)인 김해 김씨, 경주 김씨와 이씨들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이씨인 경주 이씨 그리고 신라의 시조요 박씨들의 조상인 박혁거세 등이 모두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 3대 대성인 김·이·박 삼성(三姓)의 주요 씨족들이 모두 시조 탄생 설화를 가지고 시작된 것이다. 비록 탄생 설화는 신화화되었으나 그들은 분명 우리 민족 대성(大姓)들의 뿌리라는 실체와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비록 이들의 개국시조들이 모두 신화화되었을지라도 분명한 민족적 실체를 가진 실체적 역사를 반영한다. 신학에서도 불트만의 비신화화(非神話化) 개념이 있으나 초월적 계시인 성경은 비신화화하면 안 된다. 하지만 인류가 기술한 신화적 역사는 반드시 비신화화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초기 역사 복원을 위한 노력들
일제 탄압의 역사 속에서 말살된 고조선 역사나 삼국의 초기 역사를 복원하는 데는 많은 학자들의 수고가 있었다. 먼저 일제 시대 고대사 복원을 위해 독립운동가요 민족학자인 박은식(朴殷植),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등의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우리 민족 고조선 역사 부활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1945년 8. 15 광복 이후에는 천관우(千寬宇), 김원룡(金元龍) 박사 등을 중심으로 식민사관 극복을 위한 제도권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식민사관의 뿌리가 깊은 제도권 학계에서 제대로 된 상고사 복원은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80년대, 중국 고대사학 전공학자로 고대 중국문헌에 풍부하게 등장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을 시도한 윤내현(尹乃鉉) 교수의 연구는 사학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이밖에도 한국고대사를 법철학자 입장에서 접근한 학술원 회원이었던 영미법철학자 최태영(崔泰永)은 송지영(전 KBS 이사장), 국문학자 이희승 박사, 윤태림 등과 함께 이병도 박사를 설득하여 이 박사가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여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국조임을 사실상 인정하는 논설을 게재하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고대 한반도가 조용한 은둔의 지역이 아니라 성경의 지리적 배경이 된 이집트와 아라비아에 까지 잘 알려진 지역이었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한 정수일(일명 깐수) 교수도 우리 민족 역사의 지평을 넓힌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분야에서는 딜레탕트들과 재야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단군에 대한 문헌고증을 시도한 이상시(李相時) 변호사, 씨성(氏性)으로 한일 민족 기원의 연관성을 밝혔을 뿐 아니라 삼국사기, 삼국유사, 광개토대왕비문, 일본서기 등을 통합적으로 분석하여 일본의 응신(應神) 천황이 비류 백제 마지막 임금이었음을 논증하며 비류(沸流) 백제(百濟)의 역사적 부활을 시도한 김성호(金聖昊)가 있다. 그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에 대해서도 임나가 지금의 경남 동부지역의 부산과 울산과 부산 동래에 존재하던 우리나라 왕국이었다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 임나는 비류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국가였다.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임나일본부를 한반도열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분국(分國)으로 보아 그 위치를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구주(九州, 규슈)로 비정한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밖에도 일본 만엽집(萬葉集)이 고대 우리 한국어로 쓰여진 노래라는 것을 밝혀 충격을 준 이영희(李寧熙), 한국 상고사의 실체와 일제의 한국사 왜곡·말살 진상을 문화부 기자의 눈으로 파헤친 서희건(徐熙乾), 재야(在野)에서 일본서기 해석과 한일관계사 복원을 시도한 김인배(金仁培)·김문배(金文培), 백제 담로 제도와 일본 기원의 관련성을 추적한 서강대 명예교수 김영덕,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하여 한반도 고대역사를 고조선과 부여를 중심으로 몽골, 만주, 고조선, 부여, 한반도, 일본 열도를 묶는 <대조선>(대쥬신) 사상으로 확장한 김운회 교수(동양대) 등은, 비록 이들의 주장이 제도권 학자들로부터 일부 비판받고 있기는 하나 열악한 조건에서도 식민사관의 껍질을 깨고자 치열한 학문적 열정을 쏟은 재야 학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땀과 노고 아래 이제 우리 한민족 역사는 고조선 역사는 모두 신화라거나 삼국 초기의 역사는 믿을 수 없다는 식의 식민사관을 겨우 벗어나려는 입구에 서 있다. 신화와 역사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대 바벨론 지역에서 이미 법전을 반포한 함무라비왕(주전 18C)이나 구 힛타이트 제국(주전 19C-17C), 애굽, 앗수르, 페르시아(주전 539-332) 왕국을 차치하더라도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더(주전 356-323)는 이미 주전 4세기 애굽과 지금의 서남아시아 전체를 장악하고 인도 서부에까지 이르는 동방 대원정에 나섰다. 구 페르시아 지역에서 장정 1만명을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시킬 만큼 대군사를 동원한 원정이었다. 주전 4세기 이미 세계는 이 같은 강력한 대제국이 가능할 만큼 인구와 문명이 만개하였다. 중국 대륙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순(堯舜)의 신화 시대를 지나 중국 역사는 이미 주전 21세기부터 8세기까지 하(夏, 주전 21C-16C), 은(殷 또는 商, 주전 16C-11C), 주(西周, 주전 11C-주전 8C) 시대를 열고 춘추전국시대(주전 8C-3C)를 거쳐 진(秦) 나라가 중국 대륙을 평정한 것이 주전 3 세기(주전 221)였다.
유럽과 중동과 중국의 이 같은 역사 아래서 오직 우리 한반도만 주후 3세기가 되도록 오랫동안 미개의 상태로 남아있었다고 보는 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고조선(古朝鮮)은 우리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만 등장하는 국가가 아니다. 이미 중국 사서(史書)인 <사기(史記)>의 조선열전, <한서(漢書)> 지리지, 가장 오래된 지리책인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 분명한 역사적 국가였다. 이외에도 고조선 관련 내용은 중국의<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수서(隨書> <남사(南史)> <북사(北史)><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통전(通典)> <통감> 등 여러 중요 사료에 등장하고 있다. 즉 고조선 역사에 대한 문제가 있다면 고조선의 실체가 정말 있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고조선 역사의 문제는 고조선 초기 역사를 어디까지 상향할 것인가 하는 것과 초기 고조선 신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가하는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과 그 이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삼국과 가야의 초기 역사를 부정한다는 것은 식민사관에 천착한 제도권 역사학자들의 직무유기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한반도의 역사는 고조선과 그 고조선의 뒤를 이은 다양한 씨족과 부족들의 정치적 이합집산과 동맹을 거치며 역동적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우리 민족의 주류는 역사적 실체로 엄연히 존재한 고조선과 그 뒤를 공백 기간 없이 이어 받은 다양한 정치 집단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주로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 연맹체의 씨족과 언어와 문화와 사회상 속에서 그 주류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집단의 역사와 문화를 성경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고 본다.
역사적 창조 신앙 증거를 외면한 한국 기독교계의 게으름
족보의 종교요 역사의 종교인 한국의 기독교는 애석하게도 단군이 신화라는 담론에 천착하여 고조선을 백안시하려는 풍조와 복음적 해석의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게으름 속에서 지난 세기를 흘려보내버렸다. 다만 진보신학측에서 1963년 윤성범이 "단군신화는 삼위일체의 흔적이다"라는 논문을 통해 토착화신학과 단군 신화논쟁을 촉발한 적이 있다. 함석헌은 우리 민족이 기독교신앙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수천 년 동안 민중의 가슴 속에 한님(환인) 곧 '하느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보신학의 윤성범, 유동식, 김경재 등은 이 같은 함석헌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2003년 허호익 박사가 단군신화의 문화사적 해석과 천지인 신학을 전개한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단군신화의 전승 초기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추적한, 단군신화에 대한 종합적이고도 전향적인 이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시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기독교와 한반도 관련사에 대한 고찰로는 한글의 히브리어 기원설을 주장한 조철수 박사, 사도 도마의 동아시아 선교를 다룬 정학봉 박사, 삼국시대 전래된 불교와 기독교(경교)의 관계를 다룬 임정의(林政義) 박사, 경북 영주의 분처(分處)바위와 안동 학가산(鶴駕山) 유적을 고대기독교 유적이라 주장한 유우식(兪禹植), 김해 가야를 기독교국가로 이해한 조국현 목사의 <가락국기해설>(대구말씀교회)이 있다.
기독교는 계시와 역사의 종교요 진리의 종교임을 표방한다. 심지어 육적(창조)·영적(구속) 족보의 종교인 기독교가 역사의 진리 추적을 외면한다는 것은 수세적이고 비겁한 학문적 자세이다. 창조 신앙과 구속 신앙이라는 다리를 연결해야 할 한국 기독교계의 게으름이, 그 동안 마치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성경과 전혀 무관한 민족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 성경과 우리 민족 역사의 다리를 놓는 작업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진리요 참 역사인 성경적 신앙의 초석을 놓는 작업을 시도할 때라고 본다. 진리에 바탕을 둔 바른 해석만이 복음 전파에 있어 참된 힘과 참 능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계속).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