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0년 간 서구의 팽창주의와 지배문화에 희생되어 "주권, 땅, 문화, 언어, 정체성" 등의 오중상실(五重喪失)을 체험한 북미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섬김"의 정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들을 "빨리 빨리" 하며 앞에서 서둘러 끌려 하면, 그들은 다 도망간다. 그러나 안보이게 "만만디"하면서 뒤에서, 낮은 자세로 서서히 밀기(섬기기) 시작하면 우리들이 미쳐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변화되기) 시작한다. 지난날의 제3세계를 선교하는 방식처럼, "사영리"라는 총알을 준비하여 눈에 띄는대로, 발사하여 죄인의 기도-영접기도까지 따라하게 하면 그 영혼이 구원받았다고, "만세" 부르고, 잊어 버리는 Hit & Run 방식으로는 어림도 없다.
어려서부터 부흥회 때마다 늘 이해가 잘 안되고, 듣기가 거북하던 대목이, 유명한 강사를 모셔다 놓고는 대표기도하시는 분이 기도 하시기를 " ... 몹시 바쁘시고 귀하신 종님을 멀리서 모시어 와서 보잘 것 없는 저희 제단에 세워 주심을 영광으로 생각하오며 ... 시간 시간 마다 주의 종님의 입술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우리 모두 아멘으로 화답하게 하옵소서 ... "라고 기도하시는 경우였다. 주님보다 주님의 종을 더 높이는 것같은 인상을 주는 기도문이였다.
어려서부터 연속방송극이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종"에게는 늘 "놈"이 따라 다녔는데, 교회는 이상하게 "종"에 "님"자가 따라다니니 참 이상도 하네... 그런 생각이 부흥회 내내 머리 속을 뱅뱅 돌아 다녀, 영 은혜를 못 받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선교를 하면서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가복음 10장 45절,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섬기는 자"로 오셨다고 하셨고,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는 주님께서 종의 형태를 취하셨다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신약에는 종(= 노예) 이라는 단어(Dulos)가 127번, (Diakonos)가 31번, 구약에는 남종(=노예)이라는 단어(ebed)가 무려 800번, 여종이라는 단어(amah)가 55번이나 등장하지만, 선생 또는 지도자라는 뜻의 καθηγητής(까세게떼)라는 단어는 신약을 통털어 겨우 3번 등장한다. 그것도 예수님을 지칭할 때 뿐이였다.
인간이 죄로 타락한 이후 인간들의 지도자 타령은 끊일 줄을 모른다. 최초의 지도자 타령은 구약 삼상 8장 5절에 등장한다. (삼상 8:5)'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타락한 인간의 지도자 타령을 경계한다. 야고보서 3장 1절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διδάσκαλος:디다스칼로스)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하였고 마태복음 23장 10절에서는 '또한 지도자(καθηγητή:카세게떼)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하셨다.
사실 모든 영적 전쟁의 실체는 아담과 하와 이래로 교만하여 타락한 인간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내 자신의 교만(pride)과의 전쟁이다. 속에서부터 끊임없이 치고 올라오는 교만과의 투쟁이다. 내 안에 있는 자아 즉 나는 완전히 타락한 존재라는 나의 속사람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인류는 아담이래로 사탄에게 뿌리를 둔 존재이다. 이러한 자아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특징으로 이 타락한 자아의 정체에 대해 디모데후서 3:1~5에 밝히시기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셨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타락상이 말세의 징조중 하나라는 것이다.
나를 위한다는 것의 결국은 무엇인가?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결과가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재벌가의 가정불화의 원인이 무엇인가?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하고, 또 수천억의 비자금을 해외은행에 은닉하다 들통이 나거나 또 정치인들의 끝 없는 투쟁... 아무리 정적이라도 때로는 잘한 것은 잘했다 칭찬도, 존중도, 인정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또한 교회안에서 가끔씩 볼 수 있는 성도간의 모든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가?
아무리 합리화시키고 미화시켜도 모든 지도자 타령은 결국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죄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교회나 나라의 문제는 지도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자기가 우선되어야 한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위해 주어야 하고, 너는 잘못하고 있지만 나는 잘 할 수 있다는 교만... 자기 생각이 다 옳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장 잘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인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만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마비증세, 무감각에 있다. 미친 사람이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모르듯이,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절대 절망에 빠진 인간을 십자기로, 보혈로 구속하여 성도로, 사역자로 세워 놓으면 또다시 아주 천천히 교만이 타락이 내면 속에 자리잡기 시작하기에...
헬라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Procoustes)의 침대"라는 이야기가 있다.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사람은 장대하면서 아주 교활한 사람으로, 이 사람이 아테네로 향하는 어느 길목에 자기의 철 침대를 가져다 놓고 거기에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뉘어 봐서 자기 침대보다 사람의 몸이 크면 잘라내고 침대보다 사람이 작으면 죽도록 두들겨서 늘여 놓았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 철 침대 옆을 지나가는 사람은 커도 죽고 작아도 죽었다. 무엇을 위한 교훈인가?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어리석음과 폐단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도 자기들의 잣대를 가지고 남을 재면서 자신보다 넘쳐도 문제를 삼고 모자라도 문제를 삼는다. 모든 일들이 자기의 뜻대로 되어져야 정의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불법과 부정으로 매도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연합을 해치고, 평화를 해치는 주범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 주변에는 프로크루스테스처럼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2에 말하기를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바울사도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자 몸부림을 쳤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린도전서 15:9)고 했고,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베소서 3:8)라고 했고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까지 고백하였다. "날마다 쳐서 복종시킨다"라 했고,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나(내게도)"(고린도전서 15:8)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처럼 겸손했던 바울사도를 더 없이 사랑하셨다.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은 삶의 지혜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임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4:6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하셨다.
선교사로서 이방인들애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폭포수같은 은혜를 사모하는가? 낮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를 바라는가? 낮아져야 한다.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기대하는가? 낮아져야 한다. 하나님은 낮아진 사람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생수는 언제나 계곡처럼 낮은 곳에 임하시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8:1~2에 말씀하시기를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0:17~1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말씀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군인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 제자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52~53)하시면서 아무 힘없는 사람처럼 붙잡히셨다.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스스로 버리신 희생의 삶을 본받겠다고 했다. 그것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또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고 말씀하셨다. 나를 부인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채워지는 법이다.
자고로 종은 3무의 삶을 살았다. 생명, 자유,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이 사시는 삶, 자신의 자유의지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 내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님의 것.
그러므로 내게 무엇이 좀 있다고 지도자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철저히 비워, 주님의 것이 나를 통해 조금이라도 막히지 않고 거침없이 흘러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선교사로서의 삶도 철저히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것이 나를 통해 조금도 막히지 않고 거침없이 흘러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고무줄을 늘여 놨다가 그냥 놔두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 가듯 성도들은 은혜를 받으면 눈물울 펑펑 쏟으면서 회개하며 섬기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군림하고, 지배하고, 가르치려 들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한다. 집사 때는 열심히 섬기다가도, 장로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에헴하고 섬김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전도사 때는 열심히 섬기다가도, 당회장이 되시면 나만 따르시오 이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보이는 인간들에 대한 섬김(나눔)으로 나타난다. 섬자는 타자 중심적이고, 지도자는 자기 중심적이다. 지도자가 타자 중심적이라 말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요, 자기 모순이다. 예수님의 품성이신 "온유와 겸손"은 섬자의 특성이지 지도자의 특성은 아니다.
지난 18년 동안 북미 원주민 선교를 하면서 추구하였던 핵심 가치(Core Value)는 "연함과 섬김"이였다. 그래서 사용하는 용어도 우두머리라는 뉴앙스를 주는 단어는 의도적으로 사용을 거부하였다. 우리들의 여름선교팀을 한글로는 "사랑의 군병들"(사관이나 장교들이 아니라), 영어로는 agape army 라고 하는데 문장의 어디에다 놓든지 소문자를 쓰고, 팀장이나 순장이라는 단어 대신 "섬자 (섬기는 자, 또는 섬기자의 준말)" 영어로는 leader라는 단어 대신에 serving servant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
지도자는 역활 집중적이지만, 섬자는 역활 분담적이다.
지도자들은 점점 더 높아지려고 하고 섬자는 점점 더 낮아지려 한다.
지도자는 야망을 꿈꾸지만 섬자는 하나님의 비젼과 전략에 귀를 귀울인다.
지도자는 늘 남을 가르치려 하지만 섬자는 늘 남에게 배우려 한다.
지도자는 늘 자신의 깃발아래 사람들이 모이기를 원하지만 섬자는 늘 주님의 깃발아래 함께모여들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북미 원주민 선교를 위해 부르신 그날부터 지금까지 우리들 모두는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과 계시아래 모여 600만 북미 원주민들이 복음으로 변화받고, 일어나 세상을 함께 변화시키는 비젼을 품고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몹시 더디더라도, 시루안의 콩나물 콩에 물을 부으면 물은 다 빠져나가도 콩나물은 계속 자라듯이, Bamboo Tree가 땅속에서 5~6년을 숨어 자라다가,
땅위에 싹을 틔우고, 하루에 5~6인치가 자라듯이, 지금은 저들의 변화를 우리들의 육안으로 잘 확인할 길이 없다 할지라도 주님의 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고 인내하며 달려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북미 원주민 선교는 섬자로 오신 주님을 철저히 본받아 북미 원주민 선교 참가를 통해 훈련된 이 섬김의 정신이 철저히 몸에 배여, 자신들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가정을 섬기고, 사회를 섬기는 섬자가 되는 운동이다.
북미 원주민 선교 연합회 김동승 선교사 올림.
***agape army (사랑의 군병들) 2014-북미 원주민 여름 연합 선교팀에 합류하시기를 원하시거나, "북미 원주민 신학교"의 운영과 장학 기금을 후원하실 분은 647-221-0777, 또는 agapearmy@hotmail.com으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 www.agapearmy.com